12월의 어느 저녁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곳 자료실 한쪽에 앉아 희곡과 소설과 시 등을 읽었다. 그 해 공무원 시험은 다 끝났고 다음 해 공무원 시험까지는 시간이 남은 시기, 나이는 한 살 더 먹는데 다음 해 시험에서의 합격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직, 공시생, 취업준비생 등 불안정한 나의 현실 속 정체성을 바꿔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설가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하는 그나마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읽고 가끔 쓰는 일이었으니까. 소설가도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니 공무원 보다 먼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근거 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등단은 그 새로운 정체성을 인정받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보였다. 등단은 나의 소설이 혼자 쓰고 마는 글이 아닌, 다른 누군가 읽는 글로써 가치를 인정받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당장의 등단은 나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내가 글을 쓰면 얼마나 써봤다고, 전국의 대학 문예창작과와 소설창작강좌 등에서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들도 많을 텐데 내가 어떻게 바로 등단을 하겠어. 지금은 좀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좀 더 읽고 쓰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진학을 생각한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대학원생이 되니까. 대학원생 또한 안정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처럼 아무 소속 없이 지내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앎에서도 조금은 나아질 테고, 그렇게 얻은 앎은 학위로 이어져 취업준비나 소설가가 되는 과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 그런 생각으로 문예창작전공 대학원을 찾아봤고, 그 가운데 등록금과 소속 교수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고려해 지원할 대학원을 정했다.
대학원 입학을 위해 입학원서와 자기소개서와 두 편의 단편 소설을 낸 뒤 면접 날을 기다렸다. 면접에 앞서 예정된 필기시험은 코로나19로 취소가 되었다. 시험 부담이 없어진 만큼 면접이 중요해졌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면접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면접에서 문학 소양을 본다는데 그 소양을 단기간에 끌어올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학부 때 읽다 만 문예이론 책이라도 다시 읽으면서 용어라도 몇 개 외워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설프게 아는 지식은 어쩔 수 없이 티가 나 오히려 좋지 않게 보일 것 같았다. 면접을 볼 교수님들께서 이미 자기소개서와 단편 소설로 응시자들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을 하셨을 테니 그냥 마음 편하게, 전형료 만큼의 비싼 경험 해본다는 생각으로 다녀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어 교수님들이 어떤 글을 썼는지 미리 알아두자는 생각으로 교수님들이 낸 작품 가운데 아직 읽지 않은 작품들을 찾아 읽었다. 11월의 그 어느 저녁, 도서관 자료실에 앉아 희곡, 소설, 시 등을 읽은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자료실에서 책을 읽다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를 보니 화면 상단 알림 창에 뜬 부재중전화 목록이 보였다.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이게 무슨 번호일까, 스팸 번호인지 찾아봐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 문자 알림이 떴다. 부재중전화를 건 번호와 같은 번호에서 보낸 문자였다. 문자함을 열어보니 한겨레21이라 적힌 첫 문장이 보였다. 한겨레21이라니. 이곳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올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손바닥문학상. 올해부터 주제공모로 바뀐 손바닥문학상. 김금희 소설가님과 김하나 작가님과 홍성수 교수님이 심사를 보기 시작한,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님이 데뷔한 그 손바닥문학상. 평소 신경 쓰던 주제인데다 새 심사위원 님들께 글을 보일 수만 있어도 좋겠단 생각에 마감에 맞춰 참가했던 그 손바닥문학상 말고는 한겨레21에서 나에게 연락을 해올 일이 없었다. 손바닥문학상이야. 맞아. 그것 말곤 없어. 나는 전화 가능할 때 문자 달라는 내용의 그 메시지를 읽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와 텀블러를 챙겨 자료실을 나섰다.
나름 나쁘지 않게 썼다 생각했는데 진짜 상을 받는 모양이야. 마감에 맞춰 급하게 내면서도 가작까지는 노려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왜 그렇게 마감에 닥쳐서 썼을까 아쉬워지네. 여유 있게 미리 썼으면 대상까지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도서관 자료실을 나서 로비에 놓인 식수대로 향했다. 식수대에서 텀블러에 물을 받아 마시며 차분하게 전화통화를 하자고 생각했다.
메시지에는 전화 가능할 때 문자를 보내달라고 하셨지만 이미 여섯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혹시 나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시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문자를 보내는 대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기사를 통해 이름만 익히 들어왔던 기자님과 어색하게 인사말을 나눈 뒤 기자님께서 지금 손바닥문학상의 심사결과가 나왔다고 알려주셨다. 내가 뭐라고 상을 받나. 조금만 더 잘 썼으면 대상을 받았을 텐데.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뒤섞이던 그때 기자님께서 심사결과를 말씀해주셨다. 내가 대상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네? 제가요?” 이어서 나오려던 왜냐는 물음은 조용히 삼켰다. 아니, 내가 왜…. 더 좋은 글도 많았을 텐데 왜…. 기자님께서는 축하 드린다는 말과 함께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글을 쓰는 일을 하는지 여쭤보셨다. 공시생이라 하자니 소설을 써낸 일을 설명하기가 애매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아주 안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많이 쓰거나 열심히 쓰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깐 망설이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공부…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가 뭘 하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