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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은 Oct 19. 2021

기역니은

1996년 H.O.T.가 데뷔했다. 그날 나의 세계는 새로이 짜여졌다. 바이오맨에서 파워레인저와 터보유격대와 컴퓨터특공대 등으로 이어지며 나의 세계 속 중심에 섰던 특촬물은 이 아이돌 그룹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들이 대부분의 전대물 속 주인공들과 많은 부분 닮은 덕이었다. 여러 전대물 속 주인공처럼 이들의 수도 다섯인데다 나이도 10대 후반으로 비슷했다. 정의를 위해 악당들과 싸우듯 이들 또한 무언가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뷔곡 마저 〈전사의 후예〉였던 이들은 곧잘 ‘가요계의 전사’로 소개되곤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그들은 변신수트와 합체로봇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처음으로 만난 우상이었다. 그 가운데 강타는 나에게 그룹의 중심과 같은 인물이었다. 전대물 속 리더를 보는 듯한 이미지나 그룹 내 역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강타라는 이름부터가 남달랐다. 이름이 강타라니. 이 이름은 그 뜻 그대로 무언가 거대한 악에 맞서 싸우는 듯한 인물의 이름이 아닌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되는 걸까. 내 이름은 그렇지 못한데…. 그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그의 본명은 안칠현이고 강타는 예명이란 사실과 함께 예명은 본명을 버리지 않고도 스스로 원하는 대로 붙여 쓸 수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가능성을 본 기분이 들었다. 나도 나의 이름을 내가 원하는 대로 붙일 수 있겠구나. 어쩌면 그 이름대로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삶과 내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어울리는 새 이름을 고민했다. 강타와 비슷한 이름을 생각하기도 했었고, 이후 뒤늦게 알게 된 서태지의 명명법에서 힌트를 얻기도 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름들 가운데 어떤 이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 가서 쓰자니 부끄럽게 느껴지는 이름뿐이었다. 뜻이 거창해 보이는데다 그 의도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새로운 정체성을 포기하싶지 않았다. 새로운 이름을 쓸 수 있다는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실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훌륭한 예술가의 이름은 그 예술가의 작품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어떨 땐 그 이름에서 작품의 아우라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윤동주의 시는 윤동주 같고, 이상의 글은 이상 같다. 데이빗 보위가 했던 음악은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가 했을 음악과 다를 것 같고, 프레디 머큐리가 했던 음악은 파로크 불사라가 했을 음악과 다를 것 같다. 기형도 시인의 이름이 김형도였다면 그 시의 감상도 어쩐지 달라질 것 같다.


신촌의 문화교육센터에서 들었던 소설창작 수업에서 나는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하나 써냈다. 소설을 쓰려던 나름의 시도 끝에 겨우 써낸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는 기은이란 인물이 나왔다. 화자와 비슷한 경험을 시간차를 두고 겪는 탓에 그의 분신처럼 읽히기도 하는 인물이었다. 전체 수업의 마지막 날, 그 소설의 합평을 받은 뒤 참여한 종강기념 식사 자리에서 수강생 가운데 한 분이 그 이름을 내 필명으로 써도 좋겠단 말씀을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쓴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필명으로 쓴다면 그 작가와 소설은 어떻게 읽힐까. 그 말에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손바닥문학상에 응모를 하면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썼다. 어쩐지 어색하지만 새로운 이름을 쓰고 싶어했으니 글을 쓸 때 만이라도 한 번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수상이 결정되고 잡지에 내 글이 실렸을 때, 그 글을 읽으신 어머니께서 한 번은  이름에 대해 여쭤보셨다. 왜 그 이름을 썼는지, 무슨 뜻이 있는지 여쭤보신 말에 나는 별다른 뜻은 다고 대답했었다. 지금이라도 뜻을 만들면 만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제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의 상황에 빗대 기역 니은의 기은으로. 기역니은, 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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