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따라 세월 가듯

by 이상역

직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책을 읽은 적이 별로 없다. 그러다 직장에 들어와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틈틈이 수필이나 산문이나 여행서 등을 읽으면서 글도 써왔다.


글은 남이 쓴 것과 내가 쓴 것을 읽으면 차이가 난다. 남이 쓴 글을 읽으면 글이 어떠하다 비평을 할 수 있는데 내가 쓴 글은 무엇이 어떠하다고 비평을 할 수도 없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글의 생명은 누군가가 읽어 주어야 한다는 슬픈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그 누군가가 읽어주지 않으면 글을 곧 사어가 된다. 어떠한 글이든 남이 잘 썼다고 읽을 만하다고 인정해 주면 글쓰기 기본은 갖춰진 셈이다.


뒤늦은 나이에 멋모르고 글 쓰는 세계에 뛰어들었다. 아직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수준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처럼 지리 여행에 인문을 더하는 글을 써보고 싶다.


여행지에 가서 이곳저곳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에 대한 체적과 향기와 마을에 전해오는 전설을 함께 엮어 따뜻하고 사람 냄새 폴폴 나는 구수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언젠가 과천의 교육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세상은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인 정보화 사회에서 제4의 물결인 속도와 공간의 혁명이 다가오는 시대가 될 것이란 교수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제4의 물결이란 오늘날 시대적 화두로 등장한 디자인과 이미지의 문화를 고양하기 위해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몸담았던 직장은 사회적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부처로 문화를 접목한 홍보가 필요한 곳이다. 다른 부처의 기관장은 재직하다 퇴직하면 자신이 살아온 삶과 직장에서 느꼈던 소회를 담아 수필집을 써서 각 부처의 자료실에 보관해 두고 직원 누구나 읽도록 한다.


그런데 내가 근무한 부처의 기관장 중에는 변변한 수필집 한 권을 남긴 분이 없다. 한 부처의 이미지와 문화는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부처의 이미지나 감성을 호소하는 방식에는 수필집도 당연히 포함된다. 어느 기관이나 직원 개개인의 감성과 생각도 중요하지만, 기관장의 감성과 생각은 파급효과가 아주 크다.


나는 직장에서 물러나면 여행 작가가 되어 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유명한 작가처럼 글을 잘 쓰지는 못하겠지만, 퇴직 전에 꾸준하게 기반을 닦아 놓으려고 한다.


나는 여행지에 대한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누는 따뜻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여행서나 산문집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과천의 교육원 입구에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갖춘 고목의 플라타너스가 우람하게 서 있다. 그 나무처럼 직장을 퇴직하면 나만의 아우라를 갖추고 여유롭고 넉넉한 삶을 살고 싶다.


삶의 여유를 갖고 사는 삶에는 사람이 공감하는 따뜻한 언어가 들어 있고 온후한 글에는 작가의 안온한 마음과 훈훈한 정이 깃들어 있다.


그간 직장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제쳐두고 앞에 세웠다. 이제는 밥벌이에서 한걸음 뒤로 물리나 글이나 쓰면서 지역과 사회에 봉사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더불어 직장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어렵거나 난처한 일에 처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물론 사회에 나간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바를 모두 하면서 살지는 못할 것이다.


조직을 벗어나 보호막이 없는 사회로 나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과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청춘을 바쳐 일한 직장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언제나 우선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사회를 위한 우선순위는 뒤에 두고 나 자신을 위한 내적인 투자에 소홀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긴 여행을 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으니 앞으로는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해야 한다.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자 몫이다.


반성 없는 과거가 없듯이 희망 없는 미래도 없다. 지금껏 가정에서 무사히 직장에 다니며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주변 사람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도움 덕분이다.


그런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주변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도움을 드릴 수가 없다.


그나마 내가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잘 쓰지 못하는 글을 통해 풋풋한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훌륭한 사상가나 작가는 아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걸으면서 느낀 생각을 표현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느낀다면 다행이다.


나의 변변치 않은 글이 주변 사람에게 얼마나 마음의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해서 제2의 인생의 목표로 정해서 터벅터벅 가려는 것이다.


먼 미래의 어느 날엔가 지금 생각하고 목표한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리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려고 한다. 그날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만 바람에 실려 세월 가듯이 천천히 내 길을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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