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날씨가 좋아 예년보다 벚꽃이 일찍 폈다. 벚나무 가지마다 한 아름의 꽃을 매달고 있는 모습이 멋스럽기만 하다. 집 앞 벚나무에도 꽃이 하나둘씩 피는가 싶더니 무더기로 활짝 피었다.
봄꽃 중에 벚꽃이 화려하게 꽃놀이를 즐기는 것 같다. 신문이나 방송마다 벚꽃 축제 소식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산이나 절이나 지역마다 벚꽃 축제를 하지 않으면 유명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을 걱정이라도 하듯이 벚꽃과의 인연과 행사 소식을 알린다.
봄꽃 중에 그나마 사람에게 대접을 받는 것은 벚꽃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철로 접어들었다는 계절의 의미 때문일까. 매화나 산수유는 꽃이 소리 없이 조용하게 피는데 벚꽃은 전국적으로 남녘에서 서서히 무리를 지어 행진이라도 하듯이 북쪽을 향해 진군한다.
마치 군대의 행군처럼 요란스럽게 꽃 잔치를 벌이는 것도 벚꽃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에 맞춰 지자체나 산사에서 노래자랑이나 산사음악회나 군항제 같은 벚꽃 축제를 개최한다.
봄날에 하얀 벚꽃이 만발하고 벚꽃 잎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한적한 거리를 걸어가면 황홀한 풍경에 취해 세월 가는 줄도 모른다.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를 걸어가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이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져들 정도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봄날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버스커버스커의 ‘벚꽃 엔딩’ 노래가 들려오는 듯하다.
벚꽃이 활짝 만개하면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마술이 들어있는 것 같다. 봄날에 벚꽃이 활짝 핀 것을 바라보면 꽃이 지고 난 뒤에 맺는 버찌에 대한 추억이 떠오른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벚꽃이 피면 산과 들녘은 흰 꽃이 덕지덕지 덧칠되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해지고 봄날의 따스함에 들녘으로 향하는 욕망은 불타오른다.
봄날에 분출되는 욕망을 충동질하는 벚꽃이 지고 나면 분홍색의 버찌가 서서히 익어 간다. 싸리꽃이 피는 시기에 벼를 파종해서 모를 논에 옮겨 심는 때가 되면 산자락의 버찌도 익는다.
버찌가 익을 때면 친구들과 찌그러진 주전자를 들고 앞산에 올라가 벚나무를 찾아 종일 산자락을 누볐다. 시골에서 사월이나 오월은 먹을 것이 궁핍한 시기다. 보릿고개를 넘는 시기가 사월과 오월이다.
농사를 짓는 집에서 지난해 수확한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는 시기에 산자락의 버찌도 익는다. 벚나무도 참벚나무와 개벚나무가 있는데 참벚나무에 매달린 버찌는 콩처럼 크고 달다.
이에 비해 개벚나무에 달린 버찌는 작고 맛도 덜하다. 친구들과 참벚나무를 찾아 산자락의 이곳저곳을 헤매던 기억이 생각난다.
아침에 출근하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 벚나무에도 꽃이 활짝 피었다. 벚꽃이 만발했다고 봄이 새롭게 오는 것은 아니지만 황량한 아파트 숲에 흰색의 벚꽃이 활짝 피자 적막한 공간에 온기가 살아난다.
요즘 아이들에게 벚나무에 달린 버찌를 따 먹으라고 하면 먹지 않을 것이다. 벚꽃은 멋지고 아름답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버찌는 우리 세대처럼 추억과 낭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벚나무의 버찌는 많이 따서 먹어도 배부르지가 않다. 버찌는 씨가 대부분이다. 시골에 살던 시절 버찌를 많이 따 먹은 것을 자랑하기 위해 손에 한주먹 움켜쥐고 입술 언저리를 일부러 쓱쓱 문질렀다.
그런 모습에 서로 활짝 웃었던 기억이 출근길에 만났던 벚꽃을 바라보자 슬며시 떠오른다. 벚나무에 매달린 화려한 벚꽃도 봄날을 따라 꽃 잔치를 벌이다가 시간이 되면 낙화할 것이다.
우리네 삶도 마냥 좋은 모습으로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다. 언젠가 벚꽃의 쓸쓸한 낙화처럼 삶도 자연스럽게 스러진다는 것쯤은 감내하고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