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사랑가

by 이상역

자연의 숲은 엷은 녹색에서 점점 진한 녹색으로 변해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녹색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마주쳤던 것이 녹색이다.


요즈음 하루하루 날이 지나갈수록 더위 져만 간다. 날씨가 무더워지면 젊은 날에 즐겨 들었던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이란 노래가 떠오른다.


뜨거운 여름과 젊음을 사랑에 빗대어 부른 노래다. 젊은 날의 사랑은 봄날의 풋풋함도 가을날의 완숙함도 싫어한다. 단 한 번의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열정과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이 청춘에 들어있다.


모처럼 토요일에 우산을 받쳐 들고 집을 나섰다. 전철을 타고 가다 목적지인 전철역에서 내려 녹음이 드리워진 가로수 길로 들어섰다. 비가 내리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자 모든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다가온다.


가로수 옆 운동장에서 비를 맞아가며 공을 차는 사람, 먹거리를 찾아 나선 청설모 가족, 나와 같이 사무실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 검은 옷에 검은색 배낭을 어깨에 메고 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시야로 들어온다.


늘 마주하는 일상에도 정겨움과 살가움이 솟아난다. 수많은 색깔 중에 왜 하필 녹색이 신비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에 나는 인생에 무슨 미련이 있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에 마음을 적셔가며 거리로 나왔을까.


삶은 깊어갈수록 목마름만 더해가고 타는 갈망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 애달픈 마음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흘러간 연가를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손가락에 힘을 모아 꾹꾹 눌러본다.


내게 다가오고 지나가는 것 모두가 세월의 허망한 바람처럼 보이고, 나를 스쳐 가는 바람은 끊어내기 어려운 인연의 업보처럼 다가온다.


사무실 창밖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인생의 외로움을 노래하는 변주곡으로 들려오고, 나는 둥지를 잃은 외기러기처럼 여름이란 명사 앞에서 가슴만 애태운다.


가는 세월은 가지 말라고 노래하면 할수록 빠르게만 흘러간다. 모두가 사랑이란 젊은 날의 푸른 노랫가락이 그저 세속적인 소리로만 들려온다.


젊은 날에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마음도 시간이란 무게에 짓눌려 옭매임이 느슨해졌다. 삶의 일상이 무심해지니 사랑이란 마술도 귀찮은 존재로 변해버렸다.


그토록 소원했던 바람도 속됨과 방황의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우리네 삶은 늘 이런가 보다. 연인과 사랑할 때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변할 때까지 영원히 변치 않겠노라고 맹세한 파랑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삶이 세속에 물들수록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사랑이다. 세월의 나이가 켜켜이 쌓여갈수록 마음도 타성적이고 게으른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 누가 가는 세월을 탓하겠는가. 내 마음도 내 것이 아니듯이 가는 세월 모두가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누가 내게서 세월을 훔쳐 간 것일까. 세월을 빼앗아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내 마음이 타락하고 변해서다.


내 마음에 간직했던 소중한 것을 놓치고 빼앗기면서 기억이란 테두리를 벗어났을 뿐이다. 그런 삶을 살지 말자고 약속했던 젊은 날의 푸른 언약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세월의 시간이 깊어갈수록 세속적인 삶에 찌들다 보니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싫어졌다. 내 몸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속되고 나를 대하는 자세가 많이 흐트러진 결과다.


그러한 업보는 당연히 내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다. 그 누구를 탓하기 전에 그리고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찬찬히 나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빗물이 모여서 강물이 되듯이 작은 소망의 마음이 모여 삶을 이루고 사랑과 희망을 탄생시킨다.


이번 여름날의 폭풍우에 게으르고 나태한 나락을 하나하나 빗방울에 묻혀 털어버려야겠다. 그리고 사랑이란 젊은 날의 뜨거운 연가를 소리 높여 불러야겠다. 그런 삶을 살다가 먼 훗날 지구라는 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날 내게 약속했던 푸르고 그리운 언약을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도록 살자.


무더운 여름은 점점 끝이 없는 막다른 길로 치닫고 뜨거운 대지는 기운을 점점 잃어간다. 여름에는 마음을 뜨겁게 데워야 하는 계절이다. 내게는 정녕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지만 가는 세월의 턱에 기대어 푸른 연가나 목이 터지도록 불러보고 싶다.


오늘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렸다. 구름이 세상의 희망을 가렸듯이 마음의 햇살도 마음의 구름에 가려 빛을 점점 잃어간다. 사무실에도 짙은 어둠이 내려와 흐르는 시간을 정지시키고 선풍기만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홀로 자전한다.


갈 곳 모르는 구름처럼 내 마음도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시간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려 밤과 낮을 구분할 수가 없다.


저 하늘의 구름과 같이 세월을 따라 세상을 떠돌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구름은 비라는 자식을 지구에 보내어 대지의 뜨거움을 식혀 주지만 나는 들숨 날숨으로 뜨거운 공기만 열심히 토해내는 신세다.


빌딩 앞 야트막한 언덕에서 외롭게 펄럭이는 태극기는 비에 젖어 힘을 잃어가고, 사무실을 지키는 아저씨는 빗소리를 들으며 아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오늘도 세월을 안고 흘러가는 구름의 발자취를 따라 인생이란 시간의 흔적을 톺아보았다. 인생이 여행이듯이 우리네 삶은 시간을 따라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은 여정이다. 그 시간 속에서 오늘 하루를 구름과 비와 함께 여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오는 것, 이승에 태어나서 저승으로 떠나는 것, 직장에서 근무하다가 사회로 나가는 것 모두가 삶의 구조이자 질서다. 그 삶의 구조와 질서에서 나라는 사람도 인생이란 광야를 따라 구름과 함께 하루라는 시간에 머무르는 과객일 뿐이다.


날씨가 너무 무덥다고 짜증은 내지 말아야겠다. 인생에서 여름은 내년에도 후년에도 다시 찾아온다. 내년에 다시 찾아올 여름을 위해 노래나 불러주며 곱게 보내주는 것이 진정으로 여름을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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