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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리 Oct 11. 2021

너무 달라 너무 달라, 너무 달라 우리들은

어쩌다 보니 게임에 구원받았습니다 (3) 식물 대 좀비, 머시나리움

식물 대 좀비(Plants VS. Zombie)는 2009년 팝캠 게임즈에서 출시된 아기자기한 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웬 좀비 같은 남자가 머리에 냄비를 뒤집어쓰고 나타나서 지껄여댄다. 다행히 좀비가 아니라 아직 사람인 그의 이름은 미치광이 데이브. 알고보면 그는 천재적인 과학자다. 세상은 이미 좀비 투성이가 되었고, 자신의 집에도 좀비가 쳐들어오는 상황이라서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미친 와중에도 데이브는 자신을 지켜줄 식물 무기들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이제 당신의 임무는, 원예 활동을 열심히 해서 오른편에서 쳐들어오는 좀비를 막아서 왼편에 있는 집을 수호하고, 이미 죽은 그들을 영원히 죽게 만드는 일이다.


식물 대 좀비를 알게 된 건 스무살 초반 무렵이었다.


당시 만나던 두 살 연상의 남자친구가 게임의 조작법을 내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자석도 아닌 주제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서로에게 해로운 연애를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내게 이 게임을 알려준 게 언제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2009년에 출시된 게임이니까 이후일 거라는 점만은 확실하지만. 


그 사람과 누렸던 시간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잊을 건 잊고 남을 건 남았다. 그리고 남은 기억조차 점점 닳아져, 없는 거나 다름없게 되어버렸다. 헤어진 후로 도무지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란 것이 롤러코스터보다 빠르게 흘러가버렸으니 말이다.


우리는 글쓰기 동호회에서 만났다.


장르 구분 없이 짤막한 소설을 위주로, 누구든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는 부대찌개 같은 공간이었다. 등단이나 상금과는 무관한 공간이었지만 당선되면 종이책에 실리는 조건이 붙었고, 덕분에 언제나 새롭고 실험적인 글들로 게시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두루 만났다. 나와 그는 아주 높은 확률로, 이상한 놈이었을 거다.


가입은 그보다 내가 먼저 했다. 당시 휘갈겼던 글들은 번의 컴퓨교체 끝에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대체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말하자면 웅얼거리며 희망보다는 절망에 방점을 찍는 종류였던 걸로 기억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춘기를 지나오며 나는 까칠한 인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왜, 미국 하이틴 드라마를 보면 앞머리를 길게 기르찌그러진 본네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서 세상에 대해 아는 척, 사람들에게 죄다 질린 척하는, 그런 캐릭터가 단골로 나오지 않는가. 


그런 내가 하필이면 동호회 인싸 최고 인싸였던 애랑 엮이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를 먹고, 반대의 사람끼리 연인이 된다는 말은 과연 진리였던 걸까?


온라인에서 오가던 핑퐁으로 감정을 쌓고, 몇 번의 만남을 더한 끝에 우리는 결국 사귀기로 했다.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우리도 서로가 서로의 반쪽임을 확신했다. 그는 레이첼 야마가타와 라디오헤드를 좋아했고, 나는 인큐버스와 스테레오포닉스를 사랑했다. 


사귀기로 한 그 날 하필이면 약속장소인 부산에는 태풍이 상륙했는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니 거리는 비바람 때문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뒹구는 간판으로 정신이 없었다. 세기말이 지난 후였는데도 꼭 세기말에 온 것 같았다. 


이후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질 온갖 비극을 떠올리니, 어쩌면 우리 중 누군가는 자연의 경고를 새겨들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장거리 연애였고, 가정 환경도 별로였고, 둘 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데다, 심지도 약했다. 하지만 괜찮다고 거짓을 말했고, 무리했고, 억지를 부렸다.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은 다신 못 만날 것이기 때문에.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그러다 그가 다른 여자로 갈아탔다.


그와는 이걸로 마지막이겠구나 싶었는데 마지막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면 내가 받아주고, 내가 돌아가면 그가 받아주는 식으로 인연은 계속되었다. 헤어진 동안 각자는 다른 남자친구, 다른 여자친구를 만나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헤어진 상태에서,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기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나면 좋은 시간이 오래 갔던 것도 아니다. 결국 이런 파괴적인 관계는 서로를 위해서 제발 그만두자고 굳게 약속을 한 적도 있는데, 그 약속은 얼마 못 가고 또 무너졌다.


이런 연애가 거의 이십 내내 계속되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쯤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마치 식물 대 좀비의 끝판왕이 나타날 무렵의 난장판과 다를 게 없었다. 


둘 중 한쪽이 왼편에 놓인 마음을 사수하려고 완두콩 슈터, 호두 벽, 먹개비 등등의 식물 무기를 준비해두면 다른 한쪽은 오른편에서 양동이 좀비, 장대 좀비, 오리발 좀비 따위를 보내 호두 벽을 씹어먹고 동료의 시체를 타넘으며 날아오는 완두콩을 피하여 그 마음을 도로 앗아가려고 애썼으니까.


그래, 그때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미숙했다. 


그가 있는 그대로의 내아니라 머릿속 환상이 그려낸 나를 사랑했던 것도, 또 내가 그를 나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버린 탓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도, 모두 각자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질긴 인연에도, 진짜 끝날은 찾아왔다.


그 마지막은 이제까지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어떤 마지막보다도 어이없는 마지막이었는데, 우리가 첫번째 마지막 때 제대로 헤어졌더라면 이런 최악의 결말은 맞지 않았으리란 후회가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이별의 진짜 의미도 당시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보였다. 그 즈음 그토록 흥했던 글쓰기 동호회도 조금씩 와해되어 아주 문을 닫아버렸다. 불타오르던 청춘의 한때를 영원히 간직한 채로.


그러고보니, 식물 대 좀비 말고도 그가 알려준 게임이 하나가 더 있었다.


식물 대 좀비와는 완전히 반대의 느낌을 주는 게임, 머시나리움(Machinarium)이 그것이다.


2009년 체코의 아마니타 디자인에서 출시한 그 게임은 스팀펑크를 배경으로 한다. 손으로 거칠게 그린 일러스트가 무척 매력적이다. 주인공은 양철 깡통 로봇인데, 괴한에게 끌려가서 탑에 갇힌 자신의 단짝을 구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로봇에게 심장이 있을리가 없는데, 그 심장이 다른 존재를 향해 뛸 리는 더더욱 없는데, 주인공 로봇은 주인의 명령을 받들기라도 하듯 포기를 모르고 길을 따라, 따라서 간다. 


로봇은 때로 자신의 머리를 열고 도구를 꺼내 장치를 연결하기도 하고, 자신의 다리를 줄여서 지하의 파이프관을 통과하기도 하고, 힌트를 찾아내서 조작기를 열고 다리를 건너가기도 한다. 그리고 예상하시다시피, 게임은 짝을 구하고 둘이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지금, 이제는 알겠다.


우리가 쉽사리 헤어지지 못했던 건 어쩌면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런 해피엔딩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제는 또 알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랑을 하되 결코 정해진 해피엔딩이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관계,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관계, 다른 모든 걸 희생할 정도로 애써야 하는 관계는 한 번의 헤어짐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식물 대 좀비와 머시나리움만큼이나 서로 달랐던 우리는, 그렇게, 이별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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