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법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내가 원하는 반응과 피드백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상처를 받는다. 타인에게 상처를 받으면,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우울과 불안에 휩싸인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아이와 남편에게 집중된 시선을 나의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나의 에너지를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면, 사소한 불안에도 아이에게 화를 내게 되고, 남편에게 서운하게 된다.
한국인들이 ‘보통’이라는 ‘평범한’ 이름 때문에 좋아한다는, 스위스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우리가 두려움과 불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타인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게 되면 타인의 중요성은 약해진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모호할수록 타인의 목소리와 주변의 혼란, 소셜 미디어의 정보 등에 흔들리고 불안해진다.
아이의 나쁜 성적에, 집에서 도대체 뭐하느냐고 남편이 화를 낸다고 해보자. 남편이 화를 낸다고 해서 아이의 성적이 내 책임이 되지는 않는다. 남편이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불안 때문이다. 내가 굳이 남편의 화에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다. 아이의 성적은 아이의 책임이다. 너무 많은 것을 엄마라는 이유로 혼자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낸다는 이유로 내가 상처받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상처받는다는 말과 같다.
나는 왜 남편의 말에 상처를 받을까? 나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누군가를 만나서 남편이 화를 냈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엄마가 챙기지 않아서 아이의 성적이 떨어졌나 싶어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이까지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학원도 알아봐 주고 과외도 시켜준다고 비교하면 더욱 불안해진다.
그렇게 불안해지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상처투성이 내면의 어린아이가 속삭인다. ‘네 탓이야. 네가 부족해서 그래.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너는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그러니 부모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지.’
어린 시절, 내가 나를 보호할 수 없었던 그때에 받았던 상처들은 내 탓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엄마라는 존재가 된 어른이 되어 아직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나의 책임이다.
팔이 부러지면 우리는 정형외과를 찾아가 깁스를 한다. 부러진 팔을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 두고, 뼈가 다시 붙을 때까지 보살핀다. 팔을 부러지도록 한 사람을 찾아가 고쳐내라고 하거나, 내가 팔을 부러지게 했다고 내 탓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상처를 받았다고, 친정엄마를 찾아가 왜 그랬냐고 울면서 말해도, 오래전 일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여태 키워놨더니 고마움을 모른다며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기 쉽다. 왜 그럴까? 친정엄마는 의사가 아니라서 그렇다. 상처를 줄 수는 있지만 치유해줄 능력이 없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도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고, 지금 나에게 상처 주는 가족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나의 깊은 상처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던 나를 치유해 준건 매일 꾸준히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엄마들과의 만남. 차곡차곡 모인 공부시간과 엄마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다.
내 아이만 뒤처지고 있나, 이렇게 안 시키면 학교에 적응 못 하는 걸까, 나중에 학원 레벨이 안 맞아서 못 간다던데, 불안이 널뛰던 순간에 평정심을 갖게 해 준건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육아서와 학습서를 죄다 읽었다. 그리고 블로그에 계속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왜 내가 불안한지, 나의 상처가 왜 아직 치유되지 않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