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상처와 불안은 어떻게 나타날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달되는 상처.

by 김혜주 비올라

상처와 불안이 반복되면 자존감이 낮아진다. 엄마가 자존감이 낮아지면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모든 행동과 말을 하게 된다. 아이의 버릇없는 태도를 훈육하다가 점점 감정이 고조되어 화를 내게 된다. 그리고는 감정적으로 화를 심하게 낸 거 같아 아이에게 미안해진다. 화를 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일이 반복된다.


나름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는데도,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엄마 때문이야.” 아이가 소리치며 울어대면, 미안하지만 또 한편으로 무언가 억울해진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독점 육아’라고 계속 나를 세뇌시켜도 ‘독박 육아’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독점 육아’라고, 육아가 행복하다고 하는 그 집 아이가 궁금하다. ‘아이가 엄청 순할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육아의 상처는 대물림된다고 하던데, 내가 친정 부모님에게 받았던 서러움과 상처를 아이에게 주고 싶지가 않다. ‘나는 절대 친정엄마처럼 하지 않겠어. 나는 나의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그런 생각이 육아를 망친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많은 노력을 하게 한다. 좋은 것을 먹여야 하고, 남들 보기에 단정한 옷을 입혀야 하고, 좋은 책을 읽어줘야 하고, 잘 가르치는 학원을 알아보고 그렇게 나보다 더 아이를 챙기기 위해 애쓰게 된다. 엄마가 아이를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사랑이 사라진다.


정작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의 사랑인데, 사랑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하고 있다. 말로는 ‘엄마는 너를 사랑해’라고 하는데, 정작 엄마의 눈빛에는 ‘혼자 있고 싶어.’라는 강력한 감정이 전달된다.


엄마는 당연히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것은 당연하게 아니었다. 세상에 ‘사랑’만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자주 만나는 할아버지를 만나도 울면서 엄마 뒤에 숨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받아쓰기 시험은 계속 0점을 받아오는 나의 아들.


한글은 24개의 소리글자만 알면 모든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쉽게 만들어졌다.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워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기까지 했다.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14일 이면 깨친다는 한글인데, 그런데 왜 나의 아들은 초등학교 1학년이 지나도록 한글을 읽지 못하는 걸까?


아이가 부족할 때, 평균보다 빠르지 않을 때, 아이의 주변에 친구들이 없을 때, 그때가 가장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존감이 낮아진 엄마는 아이가 뒤쳐질 때 조급해진다. 어떻게든 반에서 중간은 하도록 하고 싶어 진다. ‘아니 왜 못하니?’ 말은 하지 않지만, 실망의 눈빛이 아이에게 전달된다.


이제 초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바라보는 기준이 높아진다. 숙제는 바로 해야지. 계획한 것은 실천해야지. 약속한 것은 지켜야지. 흘리지 말고 먹어야지.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보이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어른도 자신이 계획하고 약속한 것을 다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이는 혼자 뒤처져서 불안한데, 정작 엄마는 태평하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못 해도 괜찮아. 성적이 중요하지 않아. 건강하면 되지.”라고 아이의 두려운 감정을 몰라준다.


엄마와 아빠가, 아내와 남편으로서 서로 사랑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 아닌가? 부모가 서로 계속 싸우기만 하는데, 그런 환경에서 아이는 행복하기 어렵겠지. 그런데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어 보니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그것을 10년 넘게 지속해야 하는 것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가정환경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 나도 부족한데, 잘해야지. 아이를 위해서라도 좋은 관계를 가져야지.’ 굳은 결심을 하지만, 막상 남편을 마주하면 짜증이 훅 올라온다.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는 더욱 아이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에서 부족한 것을 아이를 통해 채우려 하게 된다. 나는 영어를 못 하지만, 내 아이는 원어민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도록 아이의 영어교육에 많은 투자를 한다. 나는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 자신이 없는데, 내 아이는 엄마와 달리 외국 경험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방학마다 해외 캠프를 보낸다. 내 삶의 빈약함과 무능함을 아이를 위한 희생으로 합리화하려고 한다.


엘리너 캐턴의 <리허설> 속 색소폰 선생님의 표현처럼, 엄마 인생의 평범함과 쓸모없음을 아이의 성공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그렇게 아이의 성공을 매달처럼 붙이고 다니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은 아이의 반복되는 실패를 바라보는 눈빛에 애정을 담지 못하게 한다. 다른 아이들은 쉽게 하는 것을 혼자서 못하는 아이의 행동을 옆에서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하고 냉정하게 바라보게 한다.


아이의 성공을 향한 엄마의 희생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희생이 포함된 사랑은 많이 하면 할수록 아이의 상처가 함께 커진다. 엄마인 나의 낮은 자존감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어린 시절 받은 상처까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해주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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