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보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었다.
타인을 만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그 사람에 비친 내 모습을 알게 된다.
타인을 아무리 알게 되더라도 내가 나를 아는 만큼은 알 수 없을 것이고,
그건 타인의 모습에 비춘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를 오지게도 많이 알아가고 있다.
대충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보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분
입사하고 나서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엄마가 넌지시 이제는 너도 결혼에 맞는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내가 만나던 사람들은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결혼이 불가능 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때 마침 회사 과장님이 괜찮다고 했던 결혼정보회사가 있었고, 지인 추천으로 소개받아 등록하게 되었다.
해운대에 소재한 결혼정보회사는 부울경. 부산, 울산, 경남, 가끔씩은 대구나 경북 사람들과도 매칭을 시켜주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소개를 시켜준 것으로 기억하지는 않지만, 내가 서울로 이동한 후에도 잊을만하면 일 년에 한두 번씩 매칭을 해준다.
이분은 이 결정사에서 연결시켜 준 분이다.
결혼정보회사인 만큼 어머니들께서 궁합을 미리 보는 경우도 있어, 생년월일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간부터 조금은 과장되어 있는 디테일한 정보가 깨알같이 가득가득 카톡으로 전달되어 온다. 사진과 함께.
회사 프로필용으로 찍은 사진 같았는데 나보다 4살 많은 그 사람은 무슨 임원처럼 보였다. 나도 동안은 아니지만 짐작하건대 이 사람은 최소 semi 노안까지는 갈 거라고 봤다. 그리고 내 예상은 안타깝게도 딱 맞아떨어졌다.
사진 외에 프로필은 나쁘지 않았다. 결혼을 생각함에 있어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계셨다. 서울에 자가도 있었고, 연봉도 1억이 넘었으며,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가족 관계도 화목했고, 그 무엇보다 나를 참 잘 챙겨주었다.
첫 번째 만남은 핫하다는 용리단길이었는데, 전형적인 파스타집에서 만났다. 파스타 집 이후에 갈 카페도 다 준비하신 부분에서 나를 배려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로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결론적으로 첫 번째 데이트는 나에게 많은 웃음을 주었다. 그분이 서울에 온 지 14년이 넘었음에도 어제 상경한 것 같은 찰진 대구사투리와 아저씨 같은 모습에 그냥 계속 웃음이 났다.
근데 그 사람은 그 웃음을 긍정적인 리액션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뭐 내가 비웃은 건 아니니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웃음은 약간의 현타 성격의 웃음이었는데
용리단길에 유독 그날 어리고 몸도 좋고 잘생긴 남자들이 참으로 많았다.
거기서 큰 바위 얼굴에 어깨는 좁고 50대 같아 보이는 만 39살 남자와 걷고 있는 내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났다.
왜 나는 길거리에서 왕왕 보이는 잘 생긴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니는 수많은 여자보다 내가 뭐가 못나서 왜 내 옆에는 그런 남자가 아닌 이런 분이 계시는 건지. 허허허. 웃음이 났다.
어느 정도 해탈한 내 웃음과 태도에 이 사람은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첫 번째 만남 후 그분이 일본으로 여름휴가를 떠났고, 첫 번째 만남이 끝나기 전에 야무지게 다녀와서 보자는 애프터를 청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2주 남짓 지나고 약속을 잡았고, 분위기 좋은 이자카야에서 그는 일본에서 사 온 초콜릿이라며 부담 가지지 말라고 양껏 생색을 내면서 (나쁘지 않았다, 귀여운 생색으로 느껴졌다.) 가볍게 선물을 내밀었고, 그런 조그마하지만 센스 있는 선물은 세 번째 만남에도 계속되었다. 돌아보면 내가 이 사람이 귀엽게 느껴진 이유는 어느 정도 우리 아빠와 닮아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준걸 칭찬받고 싶어 하는 귀여운 생색, 아빠처럼 커다란 얼굴, 그리고 사회생활을 오래, 그리고 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적당한 연락과 적당한 쉼을 편안하게 타게 하는 여유까지.
파워 J라고 하는 그는 데이트 코스도 다 생각해 왔다. 덕분에 나는 그저 편하게 그 자리에 가서 그에게 선물을 받을 때 기뻐하며 맛있는 것을 맛있게 먹고 음료를 즐기면 되었다. 마지막 만남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고마운 마음 + 거절하게 될 것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저녁을 대접하고자 했지만 그는 영수증을 뺏어들 고는 웃으며 '커피나 사주이소'라고 했다.
챙김 받는, 쉽게 제공받는 이 느낌이 편안하고 좋았다. 내가 드디어 이렇게 챙김 받고 이쁨 받고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점점 더 괜찮은 사람과 나도 점점 나 자신을 예전보다는 귀하게 바라보고 있구나. 나는 이런 케어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만남에는 처절할 정도로 그 사람의 눈코입, 손, 목, 팔 등을 자세히 훑었다. 내가 이 사람을 만질 수 있을까. 이 사람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갤 수 있을까. 상상하며 가양칼국버섯매운탕 앞에서 김이 펄펄 나는대도 쳐다보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는 내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외모를 제외했을 때 (제외할 수 없는 요소란 걸 알지만, 내 눈알이 2개나 있기에) 다른 모든 것들이 괜찮았기 때문에. 나도 노력했다.
그 사람이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그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굴이 크고 어깨가 좁은 탓에 (우리 아빠는 얼굴도 크지만 어깨도 넓다.) 레고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고, 어딜 가나 목소리 통이 큰 이 분이 쓰는 사투리에 (나도 사투리를 쓴다.) 반강제적으로 우리 주위 테이블은 우리가 경상도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고, 한강공원을 걷는데 나를 스쳐가는 모든 남자들의 어깨만 내 눈에 들어왔다.
소개팅남을 정리하는 것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굳은살이 잘 배겨있다. 그렇게 큰 타격도 사실 없다. 나는 내가 공손하게 사람을 정리하는 멘트까지 정해져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한테 그 말을 전할 때는 마음이 안 좋았다. 조금만. 조금만 내 스타일로 생기지. 다 괜찮은데 조금만. 나랑 같이 걷기에 내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만. 그 정도만 되지.라고 가능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하며 그 사람과 관계를 정리한 그날 밤 침대에 앉아서 울어버렸다.
왜 이렇게 쉽지 않냐고. 내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텐 이렇게 쉽지가 않냐고 억울한 마음을 왕왕 가지며 그렇게 울어 버렸다.
1차 면접인 외모를 제외한다면, 결국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줬던 행동, 나를 생각해 줬던 마음, 이런 것들이 나에게 가장 크게, 그리고 오래 진한 자국으로 남는 것 같다.
오늘이 마음을 전하고 연락을 끊은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그 사람도 나도, 좋은 인연을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진하게 오래 나눴으면 좋겠다.
그 사람도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회사에 돌아와서 연애를 하고 있는 후배와, 결혼을 한 선배들에게 얘기했다.
'기적 같은 일이야 그거.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
정말 쉽지 않은 거거든. 그러니 잘해주고 즐겨. 가을 날씨 귀하잖아. 귀한 날 귀한 사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