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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Oct 02. 2023

한가로운 한가위, 배 두드리며 뒹굴뒹굴.

텃밭 채소로 만든 명절상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날, 추석     


명절이 별 건가 햅쌀로 지은 밥에 국, 전, 나물, 잡채, 고기나 생선으로 구이와 찜 등과 함께 햇과일로 정성껏 상 차리면 되지.

이제는 하늘에 별이 되어 그립지만 볼 수 없는 조부모님이나 지인들에게 ‘나 이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소, 걱정하지 마시오. 같이 밥 한 끼 먹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넋두리 마냥, 숟가락을 몇 개 더 올리고, 같이 있는 듯, 눈 감아보는 날이지.

남들이 들으며 잔망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날만이라도 하염없이 나의 그리움을 전하고 싶다.   

   

난 10년 넘게 외국에 살면서도,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조촐한 명절을 보냈었다.

갓 20대를 넘긴 친구들부터 30대까지 그리운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싶어, 나를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상을 차렸었다.

고기가 들지 않아도 맛있다며 젓가락이 가장 많이 가는 잡채. 형편이 좋은 날엔 소갈비를 해줬지만, 보통은 채소가 듬뿍 들어간 소불고기를 해줬다. 소고기 두어 점 들어간 두부 탕국과 된장찌개면 행복해했었다.

두어 개밖에 못 먹을 양의 전과 송편이지만 맛있게 먹어주던 아이들이 고마웠다. 모든 유학생이 그렇듯 빠듯한 주머니 사정, 내가 좋아하던 핑크레이디 (사과 품종) 라도 사서 오는 날엔 어찌나 고마웠었는지.

나도 그들 덕분에 명절 기분도 느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이 산천에서 동생 두부와 살고부터, 1년 걸러 한 번꼴로 설 그리고 추석 명절을 두부와 둘이서 보낸다.


처음엔 녹두전이 먹고 싶다는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하루 동안 불린 녹두의 껍질을 까고 오징어, 돼지고기, 숙주, 씻은 묵은지를 곱게 다져 한 소쿠리 부쳤었다.

잡채가 상에 올라야 명절 같다는 말 한마디에 연휴에도 일하는 동생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밑간 한 돼지고기, 시금치, 당근, 목이버섯, 양파, 표고버섯 채를 썰어 볶아, 불려 삶은 당면을 섞어 마늘, 간장, 매실액, 배즙 넣어 무쳐두고, 두고두고 볶아 먹기도 했다.      

이래저래 만들다 보면 그득해진 음식, 집에 못 가는 두부의 직장 동료들을 초대해, 입맛 다시고 잔을 기울이면 촐한 명절 잔치를 보내는 기분을 냈다. 상에 올라가는 것이라야, 양념한 돼지갈비 그리고 돼지고기와 두부를 으깨 만든 동그랑땡, 두껍게 썰어 소금으로 간을 한 애호박, 소금을 살살 뿌려 수분을 살짝 뺀 동태, 넓적넓적 썰거나 채를 친 버섯으로 부친 전.

나물이라 봐야, 시금치, 버섯, 숙주, 도라지, 호박, 가지, 죽순 중 그때그때 입맛 따라 무치거나 볶아 상에 올렸었다.     


하지만 이번 추석은 동생과 오붓하게 둘이서 지내자 했다.

음식도 적당히 하고 그동안 미루었던 집과 텃밭 정리하며 조용히, 먹고, 놀고, 뒹굴기로 우린 마음먹었다.

    

묵은 때라도 벗기려는지 동생이 이리저리 집을 뒤집기 시작한다. 쌓여있던 책들을 빨간 끈으로 묶어서 들고 나온다.

“이제 안 보는 거야?”

“언니 여기 이사 와서 한 번도 펼치질 않았어. 버리는 게 맞지.”

동생은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텃밭으로 나간다.

“두부야, 가지 따와.” 하고 동생의 뒤통수에 대고 얘기하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척 보여주더니, 총총 걸어가듯 뛰어나간다.     


이젠 내 차례, 빨래를 돌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쉬는 명절을 보내기로 했으니 음식도 간단히.      

가지를 반으로 갈라 길쭉한 반달로 썰어 소금에 절였다. 그리고 물기를 짜내고 집 간장, 들기름, 생강즙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 뒤, 팬에 달달 볶아줬다. 깨를 뿌리고 마무리.

텃밭에서 따 온 호박을 갈라 씨를 빼고 채 썰었다. 들기름과 올리브유를 팬에 넣고 달궈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채 썬 호박을 넣어 빠르게 볶아주었다. 새우젓을 넣어 간하고 생강즙을 조금 넣어 새우젓의 군내를 잡아준다.

숙주는 뜨거운 물에 데쳐, 물기를 꼭 짜고, 소금으로 간해 빻은 깨를 뿌린다.      


집 간장과 어간장, 양조간장을 섞는다. 여기에 생강즙과 물엿, 매실액, 후추, 설탕(조금), 즙을 낸 양파, 무, 사과나 배를 넣는다. 넓적하게 포를 뜬 설도를 도마 위에 올리고 칼끝으로 콕콕 찍어, 뒤집어가며 근육과 살을 끊는다. 그렇다고 토막이 나면 안 되니 조심조심. 손질된 설도를 간장 믹스에 재운다.   

   

텃밭 정리가 끝나 땀으로 범벅이 된 동생,샤워하고 나와 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소금으로 간해 물기를 살짝 제거한 동태 살과 두툼하게 썬 애호박을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 물에 담가 골고루 묻으면 프라이팬에 채소 기름을 두르고 부친다.

간 돼지고기와 으깬 두부에 생강즙, 소금을 넣어 치댄다. 잘 치대 줘야 둥글넓적하게 모양 잡기가 편하다. 동그랑땡을 달걀 물을 묻혀 지진다.   

   

소쿠리에 담긴 전이 예쁘게도 놓여있다. 탄 곳도 없이 노릇노릇 골고루 잘 익었고, 모양도 깔끔하니 얼른 젓가락으로 하나 집어 먹고 싶다. 이젠 동생의 전 부치는 실력이 제법이다. 다음엔 밑 작업을 가르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이젠 내일 아침에 불려 놓은 쌀로 밥하고, 탕국을 끓이고, 산적을 구워 상에 올리면 된다.


그녀가 노릇노릇 맛나게도 익은 전을 몇 개 들고 온다. 술이 빠질 수 없지, 컵에 맥주를 콸콸 따라 마시고 누워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날이 훤하다.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았던 홍옥, 커다란 나주배 그리고 새콤달콤한 귤을 깨끗이 닦아 접시에 올린다.

밥을 안치고 소고기를 냄비에 넣고 집 간장을 넣어 낮은 불에서 살살 볶다, 물을 부소 깍둑 썬 두부를 넣고 탕국을 끓여 그룻에 담는다.

재워둔 산적을 구워, 그 위에 잣가루를 솔솔 뿌린다. 그리고 어제 만들어 둔 음식을 꺼내 그릇에 담아놓는다.


그리운 분들을 위해 조촐한 점심상을 차리고 새로 개봉한 차를 우려 잔에 따랐다. 우린 말 그대로 차례를 지낸다.

잘 지내고 계시는지 인사하고, 맛있게 먹고,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루를 뒹굴거린다.


그날 밤, 휘영청 둥근달을 바라보고 소원을 말해본다.

“언니 무슨 소원 빌었어?”

“우리 두부, 예쁘고 현명한 남자친구 생기게 해달라고. 너는?”

“난 언니가 하고 있는 일 잘 되라고.”


조용조용하게 지나간 이틀이, 가슴이 따뜻하다.  

난 이래서 명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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