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밥을 뜰 때 밥주걱을 쓰던데, 참기름을 넣고 쌀을 볶으라는데 밥주걱을 써야 하나? 아니면 숟가락으로 해야 하나?
씻은 쌀 반 공기가 들어갈 조그만 냄비로 결정하고 참기름을 숟가락이 넘쳐 나갈 만큼 부어 쌀을 볶았다. ‘냄새는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냄비 바닥에 들러붙는 쌀이 걱정돼, 물을 부었다.
물이금세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주 많이 부어야 할 것 같아, 다시 한 컵을 부었다. 또 사라져 버린다.
아예 물을 많이 부으면 될 것 같아 두 컵을 부으니 냄비에 담긴 쌀과 물이 넘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거품이 보글보글 끓어오고 이내 넘쳐버린다.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오른 것이 익지 않았을까 싶어, 동생들과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먹어 볼까?”라고 물어보자,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남동생이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어 식히고 입에 물고 오물오물 씹는데, “쌀이야.”라며 깔깔깔 웃는다.
가만히 냄비를 쳐다보던 나는, 행주와 휴지로 가스레인지에 넘쳐난 죽인지, 쌀 물인지, 쌀인지 모를 것들을 닦아내고 조금 큰 냄비를 꺼내 옮겨 담았다. 그리고 물을 잔뜩 부어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뜨겁게 달궈지는 숟가락을 찬물에 담그고, 새로 꺼낸 숟가락을 들고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를 쳐다봤다.
또다시 더 큰 냄비에 옮겼다. 뜨거워질 숟가락을 들고 있을 자신이 없어, 불을 줄였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주방벽에 걸려있던 커다란 나무 주걱을보았다. 의자를 놓고 올라가 나무 주걱을 내렸다. 한 손으로는 힘들고 두 손으로 잡기는 불편한 나무 주걱을 들고 바닥에 눌어붙은 쌀을 떼어내며 저었다.
팔이 아픈 것보다, 조금씩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내일 아주머니가 오면 끓여 달라고 할까?’
엄마가 아파, 집안일을 도와주시러 오시는 아주머니는 월요일이 돼야만 온다. 어제도 누워 있던 엄마가 속이 안 좋다며 밥을 드시지 않았다.
“서진아, 아주머니 귀찮게 하면 안 오실 수 있으니, 아주머니 말 잘 들어야 해.”라는 말이 생각이 났고, 엄마가 누워계신 방을 한 번 바라봤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데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날 멀뚱멀뚱 쳐다본다.
“언니, 엄마 아파서 죽 먹는 거지? 엄마가 우리 아프면 죽 끓여주는데. 이제 다된 거야?”라고 쌍둥이 여동생들이 물어본다.
동생들에게 조금씩 입에 넣어주니 얼굴을 찡그린다. “쌀이지? 쌀?”이라며 남동생이 자기는 안 먹겠다는 손짓을 한다.
“조금 더 끓일까?”라고 하자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시 냄비에 있는 죽을 휘휘 저어가며 끓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생들도 지겨운지 인형을 들고 나와 소꿉놀이 중이다.
“언니, 언제 끝나?”
“누나, 난 나가서 놀다 올게.”
“끝났나 봐.” 다급한 마음에 작은 소반에 간장을 종지에, 죽을 떠 국그릇에 담아 올렸다.
상을 들고 있는 날 위해 남동생이 문을 열고, 여동생들이 “엄마 죽 끓였어.”라며 엄마에게 매달린다.
기쁜 얼굴도 아니고, 황당한 얼굴도 아니고, 그냥 빤히 날 쳐다보는 엄마가 숟가락을 들고 간장을 살짝 적시더니 죽을 한입 드셨다.
힘들게 한 그릇을 다 비운 엄마가 “고생했네! 내 딸. 동생들이랑 슈퍼 갔다 올래?”라며 용돈을 주셨다.
소반을 들고 부엌으로 돌아갔는데, ‘이건 무슨 일!’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보면 도둑이 들었을 것 같은 모양이다.
먼저 남은 죽을 한 수저 떠먹었다. 겉은 불어 익은 듯 보이지만, 아직도 익지 않았다. 내 고개는 엄마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요리에 재능이 없구나, 다시는 요리를 하지 말자!’
행주도 그릇도 모두 싱크대에 있는 볼에 넣고 물을 받아 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바닥에 늘어져 있던 쌀을 쓸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슈퍼로 달려가 한 봉지 가득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들고 수다를 떨며 마루에 앉아 놀았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그때가 막냇동생이 학교를 들어가기 전이었던 걸 보면 내가 초등학교 3, 4학년이었었다.
다시는 요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난 요리사가 되어있다.
쌀 반 공기를 들고 어느 냄비에 넣어야 할까? 고민하던 어린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재료만 보아도 찬장에 놓인 냄비를 척척 꺼낸다.
작은 냄비에 시작했더라도 넘치지 않게, 불과 시간 그리고 나만의 테크닉을 사용해 요리한다.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엔, 작거나 큰 냄비어 물을 붓고 마늘, 젓국으로 간을 해 깨끗이 소금물에 씻은 굴을 넣어 시원한 국을 끓인다. 어떤 날은 무를 썰어 넣고, 다른 날은 물에 흩뜨려 불순물을 한 번 더 건져낸 매생이를 넣어 호호 불어가며 몸에 달라붙으려는 차가운 바람을 날려 버린다.
크고 넓적한 냄비에 작년 묵은지를 넣고 푹 삶아낸 쪽갈비를 담는다. 그리고 쪽갈비 삶고 난 육수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기를 제거하고 냄비에 넣는다. 준비한 다진 마늘과 생강, 갈아낸 생고추, 고춧가루, 간장, 탱자즙, 물엿 등을 넣어 푹 끓여 상에 올리면 다른 반찬은 없어도 그만이다.
프라이팬이 없으면 넓적한 냄비 하나 꺼내 약불에 달구고, 기름을 발라 입혀 쓰면 된다.
튀김기? 두툼하고 냄비에 기름을 부어 밀가루를 떨어뜨려 뽀그르르 뭉쳐 올라오면 튀김 재료를 넣는다.
압력밥솥이 없다면 쌀에 넣을 물의 양을 1/3 정도 더해 밥을 짓는다. 처음엔 끓어오를 때까지 열어 놓아도 된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면 중불로 줄이고, 방울방울 커다란 거품이 올라오면 불을 줄이고 뚜껑을 닫는다.
죽?
이젠 죽 끓이는데 도사가 된 30년을 바라보는 요리사다.
쌀, 차조, 보리, 찹쌀, 고구마, 감자, 콩류 등 어떤 재료를 주어도 가볍게 김치죽, 달걀죽, 전복죽, 버섯죽, 채소죽, 소고기죽, 낙지죽, 죽순죽, 새우죽, 배추죽, 무죽, 깨죽, 호박죽 등 온갖 종류의 죽을 내가 들어가 될 정도의 냄비에 끓일 수 있게 되었다.
내 몸집이 들어갈 냄비를 들고도 “이까짓 거!”란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이유가 나의 어렸을 적, 엄마의 죽 때문인 것 같다.
요리에 소질 없다고 기죽어 있던 내가, 적당한 냄비를 들어 올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는다.
그런 내 모습에 가끔 부끄러운 웃음이 새어나며 내 손을 바라보게 된다.
내 손에 들어온 재료들에게, 내 음식을 먹는 이들에게 정성을 다해 손을 움직여 냄비에 넣어 맛있는 요리를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