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사각. 사각.
살짝 깎인 뽀얀 사과 살을 작은 숟가락으로 갉아내고 있는 소리다.
몇 번, 입으로 받아먹었더니, 조그만 홈이 파이고 그 주위가 옅은 갈색으로 변해 갔다.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기는 하나, 동생을 위해 갉고 긁어낸 사과를 빼앗아 먹던 나인지, 아니면 더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아기일 때 받아먹었던 기억인지 알 수가 없다.
그나저나, 우리 엄마는 그 조그만 숟가락으로 사과를 갉아내 즙이 담긴 사과를 아기에게 먹일 생각을 했을까? 아니면 엄마의 엄마가 긁어주던 숟가락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내 동생이 아기일 때 엄마 흉내를 낸다고 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 내본 적이 있었다.
입으로 한 입 베어 물어 사과에 자리를 만들고 숟가락을 들고 긁어내 보려 노오려억하고 이있어었다. 숟가락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앞으로 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박혀버린 숟가락이 휘어질 것 같다.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더니 쩍! 하고 사과 덩어리가 숟가락에서 튕겨 나와 날아올랐다가 동생이 앉아있는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쌍둥이 중 한 놈이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바라보더니, 냅다 집어 입에 넣었다. “지지.”하고 손으로 동생 입에 들어있는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꺼내 바라보다가 다시 내 입에 넣었던 것 같다.
쌍둥이를 앞에 앉혀놓고 “조금만 기다려봐.”라고 말하고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어 숟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삐그덕’하고 몸이 끼우뚱거리며 손이 미끄러졌는데, 그사이 숟가락이 사과를 긁고 지나갔다.
마룻바닥에 깨진 사과와 육즙이 튀어 난리가 났지만, 난 엄마처럼 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었다는 놀라움만이 남았다.
내가 숟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 사각. 사각. 이 아닌 긁. 긁. 긁 소리가 났지만, 동생들이 잘 받아먹었다. 밖에서 놀던 남동생도 한입 받아먹고 나가고를 몇 번 반복했었지 아마?
우리 집에는 힘들게 숟가락으로 긁어내지 않고 간편히 쓸 수 있는 일명 ‘강판’이라는 것이 있다. 무엇이든 척척 갈아주는 물건이다.
엄마는 ‘강판’에 양파도 갈고, 배도 갈고, 생강도 갈고, 무도 갈고 갈 수 있는 음식 재료라면 다 갈아서 썼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다져주고, 갈아주는 기기가 생겨나며 강판은 주방 서랍에서 자주 나오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숟가락은 여전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방을 평정하고 있다.
나도 그런 엄마의 딸이라서인가, 요리사인 나도 집 주방에선 숟가락이 계량스푼이 된다. 숟가락을 들고, 간장, 설탕, 소금, 소금, 고춧가루, 참기름, 젓국 등 요리에 들어가는 모든 조미료가 쏟아지며 스칠 때 계량은 시작된다.
뽀득뽀득 씻은 미역을 냄비에 넣고 습관처럼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숟가락에 떨어트려 달달 볶는다. 볶을 때,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떨어트렸던 숟가락을 이용한다. 조선간장으로 간을 할 때도 미역을 볶던 숟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을 볼 때도 숟가락.
상추를 씻어 손으로 잘게 자르고, 대파를 길쭉하게 어슷어슷 얇게 썰고, 양파는 얇게 채를 썰어 물에 담가 매운맛을 빼주고, 당근도 어슷하게 얇은 반달 썰기, 오이는 숟가락으로 가시를 살살 긁어 제거해 주고 반으로 갈라 당근처럼 썬다.
모든 재료를 볼에 넣고, 다진 마늘과 생강, 고춧가루, 설탕, 젓국, 간장, 매실액 그리고 반으로 가른 레몬을 숟가락으로 과육 가장자리를 콕콕 찍어내고, 숟가락을 슬슬 돌려가며 레몬즙을 짜낸다. ‘참 쉽지요.’ 아무리 단단한 레몬도 힘들이지 않고 짤 수 있다. 이제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고 살살 골고루 섞어서 구운 삼겹살과 곁들여 먹으면 다른 반찬은 없어도 된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들이 상추쌈보다 좋아하는 시그니처 메뉴인 셈이다.
아마도 모든 가정은 나처럼 반달이 되어가는 숟가락으로 주방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위 숟가락이라는 것은 나무, 쇠, 실리콘,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지며 여러 가지 공간에서 쓰이고 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많은 분들도 주방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숟가락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하고 계실 것이라 지레짐작을 해본다.
요리사라는 직업을 가진 내주방만 보아도, 밥 먹을 때 쓰는 숟가락은 식탁에서만 쓸 것이고 주방에서는 계량용 숟가락을 쓰리라고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계량스푼은 잘 쓰지 않는다.
심지어 레스토랑 주방에서도 계량스푼보다는 숟가락을 더 많이 쓴다고 밝혀야 하나?
대형주방에서는 대량으로 계량하기 때문에 계량스푼보다는 컵 종류나 저울을 많이 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일했던 메인 코스 부서에서 서비스 시간에 주로 쓰는 조리도구를 보면 집게, 쇠숟가락, 조금 큰 쇠숟가락, 나무 숟가락, 조금 큰 나무 숟가락, 긴 나무 숟가락 그리고 스크레퍼였다고 말하면 믿을까?
사실 계량스푼을 사용하는 곳을 보면 레시피를 이용해 요리를 가르치는 학원, 학교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많은 요리학원에서는 가정에 계량기가 없는 것을 고려해, 누구의 집에도 있을 법한 숟가락을 계량스푼 대신 사용하는 요리선생님도 많아지는 추세이다.
숟가락으로 개량하면 어때! 맛만 있으면 되지.
우리 집 주방에서도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숟가락이지 않나 싶다.
이제 숟가락을 밥 먹을 때 쓰는 도구가 아니라 주방 요리도 담당하는 만능엔터테이너다.
나의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엄마처럼 뜨거운 물에 소독을 한 숟가락을 가져와 사과 한 부분을 숟가락으로 도려냈다. 그리고 능숙하게 숟가락으로 사각. 사각. 사각. 소리를 내며 뽀얀 사과 알맹이를 갉아냈다. 우리 아기가 숟가락에 담긴 사과즙과 갉아낸 사과를 받아먹으며 부르르 떨던 생각이 난다.
온갖 음식 재료를 받아내던 ‘강판’ 대신 뜨거운 물에 깨끗이 소독한 ‘숟가락’은 엄마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