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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Feb 10. 2024

터무니없는 계획서

3.아스파라거스 모종도 3년을 알뜰살뜰 정성 들여 키워야 먹을 수 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나범이나 선생님들에게서 연락이 없다.

어차피 귀찮은 일은 싫어하는 선생님들이 생각과 어른들의 손이 필요한 나의 조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머릿속 깊숙한 어느 한 편에게선 걱정이 새어 나왔다.     

내가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올해부터 만들기 시작한 마당 뒤쪽으로 텃밭을 괭이와 호미, 갈퀴 하나씩 갖춰 땅을 뒤집고 돌을 파내어 예쁘게 만들어 볼 생각이다.

텃밭은 좌우로 나눠 가운데 꽃을 심고, 왼쪽에는 한식에 필요한 채소를, 오른쪽에는 서양요리를 위한 허브 종류를 심기로 했다.


마당보다 높은 텃밭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게 파낸 돌들을 쌓아 올리고 올리니 제법 ‘나도 텃밭.’이라는 것처럼 모양새가 잡혀갔다. 쌈채 씨를 뿌리고 콩을 심고, 부추와 방풍 모종을 옮겨 자리를 잡아주고, 아스파라거스 모종을 심기 전에 잠시 쉬기 위해 처마밑에 앉았다.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들고 텃밭을 둘러보고 자기만족에 젖어 한 모금 쪼옥 빨아 물고, 처마에 앉아 둥그런 의자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범이에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선생님, 저희 통과됐어요.
선생님 학교에 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동안 연락이 없어 나의 의견은 무시하고 선생님들과 다시 상의해 계획서를 작성했을 거라 예상했는데, 아닌가 보다.

한참 문자를 바라보며 고민을 했다.

어떻게 답장을 해줄 것인가?

    

봉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봉쌤 안녕, 나여.”

“애들 동아리 통과됐다는데 들었어요.”

“문자 왔던데. 계획서 내용은?”

“그때 얘기 했던 거. 학교에 와줘야 할 것 같은디.”

“그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봐.”

“몇 시에 올 거요? 점심시간?”

“아니, 애들 3시 10분에 끝나지? 그때 봐.”

“와서 점심 먹지. 오후에 수업 없는데.”

“나 바빠. 수업 끝나고 봐.”     


그날 나범이와 봉쌤 그리고 윤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대목 중 무엇을 적었는지 궁금해졌다.     

핸드폰을 들고 나범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축하해 나범아. 선생님에게 계획서와 프레젠 테이션 영상을 보내줄 수 있어?

바로 연락이 왔다.

그럼요. 지금 보낼게요. 이메일 주소 하나 보내주세요.
고마워, 참 월요일에 수업 끝나고 탕비실에서 볼까?
네. 그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마시던 얼음 동동 띄운 커피는 내팽개치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지도 못한 채 호미를 들고 아스파라거스 모종을 두 덕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귀힘이 없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힘을 주어 파는 건 처음이다. 파바박 팍팍 파바박 팍팍 거름이 섞인 땅을 파고 뿌리가 잘 번져달라 기도하며 상토를 올려 물을 뿌려 모종을 올려 흙으로 살살 덮은 다음 손으로 살살 꼭꼭 눌러주었다.


아스파라거스 모종을 심고 3년을 정성 들여 키우고 살려야, 3년 후 아스파라거스를 따 먹을 수 있다.


잘 자라기를 기원하며 물을 주고, 호미와 괭이를 수돗물에 후다닥 씻고 텃밭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제자리로 옮긴 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일 바지를 갈아입을 여유도 없이 노트북을 열어 나범이가 보내준 이메일을 찾았다.

받은 메일, 클릭

문서, 클릭

주루룩 주루룩 마우스에 달린 동그리를 돌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읽어 내려가는 눈이 피로하고 머리가 멍멍해졌다.   

  

목적

우리의 고장의 지역 특산물을 이용하여 만든 요리를 가지고 경쟁하는 지역축제에 참여하여 지역 특산물을 널리 알리고 싶어서 지원.

허투루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요리를 배워서 해남군에 있는 복지시설에 나가 음식을 만들어드리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지원.

요리에 관해 진로를 가지고 있으나, 확신이 들지 않아 나의 진로를 확답받기 위해서 지원.     

첫 수업은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해.


35회 프로그램 일정

7주간 요리의 이해, 곡성 조리 과학고등학교 견학, 7주간 칼질과 손질, 4주간 삶기, 2주간 굽기, 지역 음식 축제 참여, 2주간 굽기. 2간 튀기기, 봉사활동, 2주간 튀기기, 4주간 요리의 응용화     


학교 내외 활동

요리 이론 및 실습수업,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요리 만들어 주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통한 학교 홍보, 부스 운영 또는 봉사활동, 지역 음식 축제 참여, 조리고 방문.     

 

얼렁뚱땅 대충 겉으로 보이기에 근사하고 아이들답지 않은 생각을 넣은 계획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선생님들이 만든 계획서로 보였다.     


프레젠테이션 클릭

나범이가 당당하게 서서 설명하는 모습은 매우 흡족했다.

말속에 '너희는 이런 생각 못해봐지.'라는 듯 힘을 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남들 앞에서 말할 때 더 빛이 난다.

아나운서 같은 거 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 목소리가 좀.


녀석이 프레젠테이션은 잘했다는 건 알겠고 그나저나 저 예산으로 어떻게...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지원은 1인 500,000원. 그러니까 아이들이 6명에 담당 선생님까지 총 7명. 7명 곱하기 500,000원이면 3,500,000원.

1회 강사비가 210,000원. 9회 수업이니까 총 1,680,000원을 나에게 주고 1,820,000원으로 1년 동안 이 많은 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서인 거다.     


거기에 조리고를 방문하자는 의견에 뜨뜻미지근했었다,

유튜브 촬영 건의에 촬영할 사람도 없고 장비에 대해 걱정했었다. 장비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빌려줄 수 있다고 제의했고 선생님들이 도와주시면 안 되겠냐는 질문에 답이 없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사용자 계정을 학교 이름으로 만들어 주는 건 어떻겠냐는 질문에, 학생 교육원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 도와줄 수 없다고 했었는데 포함을 시키다니.     


나야 주는 돈만 받고 수업만 하고 오면 되지만, 이 터무니없는 계획을 기대하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난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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