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용납하는 것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안정제를 먹는다. 밥을 먹은 후에는 처방받은 약 봉투를 털어 입에 넣는다. 이제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다. 밤새 쌓인 연락에 답장을 마치면 거울을 본다. 혐오스러웠다. 거칠에 세수를 하고서 머리를 감는다. 그것이 나의 일과의 시작이었다.
나를 사랑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나를 용서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인생 중 가장 큰 결심은 나를 힘들게 했던 이들을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한 번의 결심으로 그들에게 아픔을 당했던 과거를 잊을 수 있었고, 마음의 상처는 남아있지만 그들에겐 과거를 없는 것처럼 도말하여 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 일을 당하고 있던 나는 달랐다.
사람의 마음이 상처를 입어 병이 들면 그 안에 두 가지의 죽음이 일어난다고 한다. 하나는 그 모든 울분과 상처를 밖으로 돌리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타인을 죽이고 상처 입히는 '타살'이다. 그들의 마음에 미움과 적개심이 가득 해지며 점점 자신을 고립시킨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다가와준 이들에게마저 가시를 내비치며 외로움에 타들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자살'이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자신의 탓으로 돌라며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죽여버린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며, 자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죽더라도 누구도 슬퍼하지 않으며, 금방 잊힐 것이란 마음을 떨칠 수가 없어진다. 무엇보다 그 아픔과 상처의 자리에 있던, 거기서 벌벌 떨던 자신을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가장 모질고 악독한 말로 상처를 입힌다.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을 끊임없이 좁고 검은 방에 가두고 한정시킨다.
나를 가장 괴롭히고 무력하게 만들었던 건 후자의 죽음이었다.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없애갔다. 내가 설 자리, 내가 쉴 자리를 내 마음은 용납하지 못했고,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내 병은 더욱 깊어져 갔으며, 어느새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나는 망가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피하기 시작했고 외로움 속에서 나의 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자신을 용서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나를 정면에서 부정했고, 내가 소중한 인격체임을 부인하며 나를 사지로 몰고 가는 것을 소명이라 착각했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알았고, 그런 행위가 아가 페인 줄 알았다.
나의 오해는 그렇게 자신의 소명까지도 병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내가 여러 상담을 받고, 주변의 너무나 좋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알아갈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나를 아껴주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내 생각처럼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고,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런 윤리적 규칙이 나를 끝내 붙잡았다.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단계였지만, 스스로 귀중한 존재란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끝내 나를 용서하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타자를 내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에 여유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랑의 전제 조건은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본능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우울증 환자들은 이 말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타자를 병적으로 사랑하고 때로는 그 사랑에 의존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든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랑은 결국 서로를 파멸로 이끌고 갈 뿐이었다.
때문에 건강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이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며 충만한 자존감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이타심을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 남녀의 연애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아가페적 사랑. 즉 숭고하고 거룩한 의미의 사랑을 이야기하러 왔다. 그렇다 하여 남녀 간의 사랑이 수준이 낮은 사랑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아가페는 건강한 자존감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진정으로 온유할 수 있었고, 평온한 마음속에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아가페가 내 마음에 깃든 것이었다.
이는 어떤 아름다운 말과 값진 선물을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전인적으로 타자를 용납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이었고, 상대의 외로운 인격에 존재론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내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외롭고 상처 난 가슴을 채우는 마음이었고, 마음을 덧대어 기울 수 있는 용기를 말했다.
자신을 용납하는 일은 타자를 수용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 또한 사랑을 받아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사람의 글을 찾는 건 그 마음에 어떤 외로움과 갈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그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글을 쓰며 사랑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것을 나의 소명으로 알고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쓴다.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이다. 부디 더 이상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기를,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는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