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에 대하여
성경을 들여다볼 것도 없이, 당장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자. 그곳엔 때로는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피하려 한다. 엮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시선은 높은 곳을 향한다. 더 이상 낮은 곳을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완악한 마음이 된다.
하지만 그 눈물이 자신의 몫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알게 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내가 베풀지 않아 왔던 것들이구나. 꼭 고난을 당해야만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이라면 갖춰야 할 하나의 소양 같은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이때 상상력이란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그것은 꼭 아픔을 겪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픔을 겪는다고 모두가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능력의 원천은 순전히 상대를 헤아리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를 내 마음에 품는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있겠다.
욥이 모든 걸 잃었을 때 그를 찾아온 세 친구 중 하나인 엘리바스는 친구 욥의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한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았겠노라' 신앙인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는 말이 있지만, 신앙인이 때로는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감히 신을 찾는다는 말이 그렇다. 신을 찾으라는 말도 그렇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예수는 다가가 하나님을 찾으라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함께했을 뿐이다. 위선자들이 그토록 찾던 신은 울고 있는 자들과 함께 울고 있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아주 유명한 이 구절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 않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아름다운 것은 이 말이 관통하는 역사와 성경의 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우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고난이란 그 이유를 감히 찾으려 해선 안 되는 것이다. 고난에 까닭을 찾는다면 쉬운 정죄함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을 그저 하늘이 내리는 벌로 이해한 신앙인들의 말은 처참했다. 그들의 언어는 그 누구도 살릴 수 없었다. 기독교는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종교이며, 역사를 해석하려는 종교이기도 하다.
그들은 예기적으로 선취된 종말과 앞으로 완전히 완성될 종말의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보는 눈을 사뭇 다르게 가져야 하는 소임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기독교가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고 다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았다 해석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병들고 가난하고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천대당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을 말했다. 즉 함께하고 싶지 않을, 곁에 둘 가치가 없는 이들을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은 달랐다.
육신을 입은 말씀은 그런 이들을 찾아갔고 그들과 함께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 말하는 이들에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말을 했다. 신의 다스림, 신의 임재와 동행이 그들을 위해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동안 신앙인이 가진 생각과 위선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자 이제 생각을 해보자. 고난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해보자.
"왜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이까?" 묻는다면 그 말에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고난은 그것이 지나간 역사가 되어서야 그 뒤에 그것을 겪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어째서 고난이 그에게 내렸는지를 생각하지 말고서 그 고난을 당하는 자와 함께 울라. 그것이 어쩌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로마서 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