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8] 캄보디아에서 온 편지

Rice Christian, 면목없는 선교사의 삶

by 딸삼빠

[1999-07] 캄보디아에서 온 편지

※ 일러두기 : 이 편지는 1998년에 첫 번째 직장에서 권고사직 당한 후, 1999년 1년간 단기선교로 캄보디아 프놈펜기술학교에서 컴퓨터 교사로 지내던 시절에 썼던 기도편지입니다. 70년 개띠 아재 직딩기 4편과 (https://brunch.co.kr/@givemyself/69)과 5편(https://brunch.co.kr/@givemyself/96) 사이에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정전이 잦았고 전화선을 통한 모뎀으로 느린 인터넷 연결만이 겨우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글은 이메일로 썼습니다. 24편의 편지와 베트남 육로 여행기 9편, 총 33편의 편지글로 이뤄져 있습니다. 1999년 세기말, 30세 청년 박경규가 26년 후 2025년 56세 장년 박경규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해 봅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만 넣은 편지였지만, 브런치에는 최대한 열심히 사진을 찾아서 넣어 보려 합니다. 사진은 스캔해서 넣어서 화질이 좀 나쁠 수 있고, '단기 선교사'로 쓴 글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쓰던 글투, 말투가 좀 오그라들지만, 오타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수정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등장하는 실명들도 그냥 두었습니다.(불편하시다고 알려주시면 바로 그분은 익명처리 하겠습니다.)


기도편지(8)

1999.2.17.수


기도편지를 오랜만에 씁니다. 점점 날이 무더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후 5시 40분인데, 32도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의 1도는 한 3,4도의 변화만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설연휴가 지났는데, 편히들 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도 음력설이 있는데, Chinese New Year Day라고 합니다. 역시 요란한 중국인들입니다. 설 며칠 전부터 화약을 터뜨려대서, 하루에도 몇 번씩 깜짝깜짝 놀라곤 했습니다. 차를 타고 요란한 중국악기를 울리며 지나갑니다. 음력설은 공식적인 휴일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다 며칠씩 쉬며 명절로 지내며 음식도 해 먹고 놀러 가기도 합니다. 시장 내에 많은 가게들도 쉬고, 약간 물가도 뛴답니다. 4월이 되면, 크메르인들이 지키는 설(쫄츠남)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일 년에 3차례의 설을 맞이하는 거지요.

어제는 껀달주 긷스바이지역 와꺼 마을로 갔습니다. 한국에서 의료봉사팀이 왔는데, 우리 학교 미용반과 함께 봉사활동을 나간 것이지요. 프놈펜 남쪽으로 자동차로 20,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길가에 위치한 마을인데, 비교적 살기가 괜찮은 마을 같습니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아름답고 시원한 곳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제가 사진을 잘 찍을 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곳들이 참 많습니다. 도착했을 때에 이미 마을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 있었습니다. 의료팀은 한쪽에서 기도하고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미용팀의 4명의 자원봉사 학생들과 김신애 전도사님은 한쪽 그늘 밑에서 번호표를 나눠주고 머리를 깎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깎기 시작했고, 어른들은 나중에 몇 분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에, 김항철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찬양과 율동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나라이든 아이들은 다 같은 아이입니다. 깔깔거리면서 너무 재미있어합니다. 저와 얼굴이 마주치면 수줍어하며 피하는 아이도 있고,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까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무엇을 했느냐고요? 같이 갔던 남자 선교사님들은 완전히 베짱이 노릇을 했습니다. 뭐 도움이 되는 기술이 있어야지요. 저는 순서표 확인하는 일하고, 김신애 전도사님이 사용하시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막판에 사모님이 목이 다 쉬셔서 노래를 좀 했지요. 4명의 미용반 학생들은 키 작은 아이들의 머리를 깎느라 허리를 깊이 굽히고 몇 시간을 서서 안쓰럽게 고생을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 학교의 보배들이라고 서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저 미안해서 앉아있지는 못하고, 그냥 옆에서 씩 웃으며 서있기만 했습니다. 한 명씩 아이들이 깔끔해져서, 나중에는 찬양하며 율동하며 모인 아이들이 환해 보입니다.

참, 모인 우리들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 있는데, 바로 아이스크림 장수 아저씹니다. 100리엘(약 30원)에 원뿔꼴의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데, 꽤 팔린 것 같습니다. 이 아이스크림은 원조 불량식품이어서, 우리들을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날 거라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이 나라의 영자신문인 Cambodia Daily 주말판에는, 이 나라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기사가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A4 크기에 20페이지도 안 되는 신문에서 무려 6페이지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영어가 짧은 저는 읽다가 읽다가 지쳐서 한 4페이지를 읽다 말았습니다. 시간이 되면 한번 자세히 번역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기독교 구호기관과 선교기관들이 들어와서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예산만 해도 일 년에 2000만 달러가 되고, 대부분이 현지인인 고용인들의 숫자도 200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캄보디아에서 NGO들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위치를 차지합니다. 캄보디아인들에게 NGO에서 일하는 것은, 마치 한국에서 우리가 외국회사를 선호하듯이 선호된다고 합니다.

캄보디아에서 NGO의 차량은 번호판의 색깔이 다릅니다. 번호판이 하늘색입니다. 하늘색은 이 나라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는 색이라고 합니다. 세금도 훨씬 적게 매겨집니다. 군관계자는 짙은 녹색, 외국대사관차는 노란색 등... 차 번호판만 봐도 신분이 대충 구별이 됩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송목사님을 마중하러 공항에 갈 때, 이 나라의 수상인 훈센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왔답니다. 공항 가는 온 길이 통제가 되어 꼼짝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대사관차나, 정부관계자들의 차, NGO의 차들은 어느 정도 갓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저희도 갈 수는 있었지만, 좀 위험해서 그냥 기다렸지요. 그런데, 어떤 평범한 차가 감히(?) 통제되고 있는 대로로 눈치를 보면서 갔습니다. 그러다가 화가 난 군인이 총개머리판으로 유리창 안의 운전자를 때리려고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런 경우에 이 나라에는 공무원법에서는, 그 군인이 화가 나서 총을 쏴서 죽여도 그 직속상관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군인을 체포할 수 없답니다. 어떤 형사상의 죄도 공무원은 그 직속상관의 허락이 없으면 집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무원은 아주 선호되는 직업입니다. 그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따르며,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보호하고 책임집니다.

캄보디아 데일리에 실린 얘기를 하다가 옆으로 샜네요. 이 나라의 기독교인 수는 여러 얘기들이 있는데, 가톨릭과 합하여 5만 명 정도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인구가 1150만 정도이니까, 약 0.5% 정도인 것이지요. 가톨릭은 3년 정도 교리공부를 시킨 후에 세례 받는 사람들만 신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일 년에 세례 받는 사람수가 50명 정도라고 합니다.

기사를 읽다가 rice christian이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언뜻, ‘쌀을 먹고 자란 동양인 선교사들을 의미하는가?’ ‘기독교인들이 쌀과 먹을 것을 제공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까, ‘쌀을 얻기 위해 기독교인이 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서 고통을 받을 때, 그들을 도운 사람들은 스님들이 아니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했고, 어떤 곳에서는 세례를 받으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비자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쌀과 비자를 위해서 거짓으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그들을 일컫는 말이 “Rice Christian”인 것입니다. 신문기사에서,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세례 받기를 거절한 한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선교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인터뷰 내용이 있었습니다.

선교지에서는 “떡이 우선이냐? 말씀이 우선이냐?”하는 문제가 가장 선교사들을 어렵게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질로 선교하는 사람들, 돈을 뿌리면서 돈으로 선교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떡을 주면 그들을 병들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철저히 자립하도록 해야 한다고,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말씀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었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떡을 미끼처럼 걸어놓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경계가 모호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보고, 예배를 끝내고 “잘 가라” 인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야고보의 말처럼,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몸을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고 등 떠밀어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가난한 자들 속에서 굶주린 자들 속에서 헐벗으며 계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베푼 따뜻한 인간애를 기억하시고 하나도 헛되이 여기지 않으시는 것 아닙니까?

구제하며 그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늘 ‘나는 복음은 전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나는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하는 괴로움을 마음에 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가장 효율적이고, 누가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행하고 있는가? 남의 사역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쉽고, 또 그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판단하기도 참 쉬운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뱀처럼 지혜롭지만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일까요?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rice christian에게 쌀을 공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대가 없이 베푸는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난민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길 바라며 헌신하는 것일 테지요. 자기들의 베푸는 순수한 마음들을 속이는 rice christian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라도 복음을 듣기를 예수를 알기를 바라고 기도할 테지요.

일하는 자들의 마음 중심이 그리스도 앞에서 순결하며 지혜를 구하며 일한다면, 어떤 형태로 일하든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그적거리는 그 부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채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자가 씨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듯이. 그는 단지 씨를 심고 물을 그저 준 것뿐이지요. 그 안에 생명을 넣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이지요. 어떻게 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노력과 지혜와 사랑은, 그 부족함 자체가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은혜인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이 나라에 와서 벌써 1달이 더 지났는데, 제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컴퓨터 가르치는 게 다네요. 그것도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컴퓨터를 좀 관리하고 컴퓨터 보조교사들이 공부하도록 독려하고 스터디 그룹을 할 생각인데, 그게 뭡니까? 기도편지를 보내고 후원도 부탁하려 생각하니까, 뭐라고 쓸 면목이 없는 겁니다.


제가 누구를 위해서 왔나요? 저는 예수님이 가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왔다고 생각해 줍니다. 저도 기도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는 해 볼 테지요.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서서 물어본다면 뭐라고 말씀하실지.

“그 때요, 99년에요. 사방에서 저를 거절하는 것 같아서, 힘들었었거든요. 그때 기도할 때, 거절당하신 예수님이 생각났었습니다. ‘예수님도 거절을 많이 당하셨었지. 그 거절당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로 가셨던가. 그래,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을 필요로 하던 갈급한 이들에게로, 빗물처럼 흘러가셨지.’ 그래서, 컴퓨터 교사를 한 달 이상 찾고 있다던 캄보디아로 갔었습니다. 그런데요, 1년 내내 한 게 없었습니다. 말이 안 되니까, 복음을 전하기도 쉽지 않았고, 아니 제가 좀 소극적이잖아요. 전도 한 명 못했네요. 그리고 보조교사들이 얘들을 잘 가르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뭐 그냥 가만히 그냥 컴퓨터 스터디 그룹이나 좀 한다고 깨작 거리다가 왔었거든요. 참, 그리고 캄보디아를 위해서 중보기도도 제대로 못했고요. 그리고는 사람들에게는 뭐 선교사랍시고 이름만 팔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내가 캄보디아로 널 보낸 것은 그냥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다. 나는 네가 그냥 고요한 가운데서 나를 더 깊이 만나고 알게 되길 바랐는데, 너는 또 여전히 뭔가 일하려고만 전전긍긍하더구나. 그게 답답했었단다.”


그냥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웃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도 급작스럽게 방향을 잡고 와서, 준비하는 시간에도 계속 ‘기도해야 하는데...’하는 부담이 많았었습니다. 이제, 정신을 수습해서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여쭤 봐야겠습니다.


벌써 11시가 넘어가네요.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


1999.2.17.수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박경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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