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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래오 May 20. 2020

어느 날 강아지가 말을했다.

짧은 소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프로젝트가 맡겨졌는지 이해해보려 해 보고, 시간을 되돌려보려고 해 봐도 소용없는 짓이란 것만 수없이 깨달았다. 프로젝트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된 과도한 과업일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햇빛을 보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가 뜨기 전에 출근을 해서 해가 지고 난 한참 후에야 사무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밤이든 낮이든 날씨만 좋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지만 오늘은 나의 기분전환을 위한 요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14시간 동안 꾸역꾸역 참아내더니 왜 하필 지금에서야 비가 내리는 건지. 햇빛 볼 시간이 없어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없으니 그나마 별이나 달을 보는 게 낙이었는데 흐려져버린 퇴근길 밤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무실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빌딩 군데군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보다 더 한 사람들이 있다는 우월감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겠다.


'간단하게라도 한잔 하고 싶은데 전화해볼까?'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은 없고, 그냥 집에 들어가기에는 1시간이라도 남은 금요일을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누군가 날 본다면 5일 내내 열심히 일하고 주말마저 알차게 즐기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해주길 바랬다. 일단 집 까지 가는 버스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잠시만 고민을 해보자.


 일단 회사랑은 최대한 멀어지고 싶은 본능에 이끌려 무작정 걸으면서 카톡을 열었다. 사람의 3대 욕구는 회사 기피 욕을 하나 더 추가해서 4대 욕구로 불러야지 싶다. 친구 목록에는 10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등록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연락한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는 몇몇은 누군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단을 하거나 정리를 하기엔 귀찮아서 그냥 놔둔 사람들이 대부분 었다. 그래서 의미 없는 친구 목록은 재껴두고 대화목록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최근에 누구랑 대화를 했는지 이 시간에 부르면 나올 만큼 유대감이 생긴 사람이 누군지 기억을 더듬었다.


 최종적으로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줄 후보로 뽑힌 몇 명이 있었지만 결국 나의 선택은 바로 집으로 가기였다. 오늘은 그냥 속에 있는 울분과 서러움(?) 정도는 아니라도 묵어있던 스트레스를 토해내고 싶은데 아무런 보상 없이 내 말을 얌전히 들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치킨이랑 맥주 정도는 사줄 의향이 있었지만 오늘 나의 상태는 소고기급이었다.


'얘는 무슨 말만 하면 나를 배부른 놈이라 하니깐 패스, 얘는 너무 착한데 항상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같지 않아......'


 이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몇 번의 경험을 통한 빅 데이터였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진심이 담긴 그렇구나, 힘들었겠구나, 수고했어 정도의 대답이었다. 나머지는 시간은 나만 입을 열고 말하고 싶었다.

 마땅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집에 있는 진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요즘엔 안 그래도 긴 근무시간 때문에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 나보다 외로움과 더 친해지고 있는 아이였는데 오늘마저 그 아이를 두고 새벽에 들어갈 순 없었다. 애초에 나 같은 주인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해봤자 진이를 책임 질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이미 10년이 넘게 같이 살아 가족이 돼버린 강아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맥주는 행사상품이라 저기 뒤에 있는 땅콩 가지고 오시겠어요?"


소주를 한병 추가할까 하다가 술이 당기는 날이 아니라 그저 술이 그리운 날이었기에 맥주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전부리가 될만한 몇 가지를 고르고 카운터로 향했다.


"잠시만요. 이 소시지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나는 소시지를 즐겨먹지 않지만 못난 주인을 만나 매일매일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진이를 위한 음식이었다. 강아지에게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주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 혼자 불타는 아니 (평일에) 불타고 남은 재같은 금요일을 즐길 수 없어 진이와 함께 방 안에서 일탈을 하기로 결정했다. 난 맥주 넌 소시지.


"진이야. 형아 왔다! 잘 지냈어?"


태어난 지 3개월 정도 된 진이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를 기억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나를 쪼그마한 푸들 진이가 이해해줄 리가 만무했다. 대신 퇴근을 하고 나면 '날 좀 더 신경 쓰란 말이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과격한 방법을 선택했다. 매일 하나씩은 깨지고 떨어져 있었다. 몇 년 후엔 내 침대에 올라와 이불이나 베개를 물어뜯고, 좀 더 커지고 힘이 세지니 장판까지 뜯어내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집을 리모델링할 수 있게 훈련을 시켜볼 걸 그랬다.


 다행이라고 말하긴 미안하지만 3년 정도 그 난리를 버텨내고 나니 진이는 방안에 모든 것에 관심을 끊기 시작했다. 득도했거나 그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겠지?라고 혼자 결론지었다. 사실 그런 진이가 정서적으로 잘못 크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가장 먼저 걱정이 되었다.


집에 들어서고 나는 씻지도 않고 옷만 갈아 입고 바닥에 상을 깔고 앉았다. 진이에게 집중하기 위해 켜져 있던 티브이도 끄고, 본격적으로 쏟아낼 준비를 했다. 미안해 오늘의 내 감정 쓰레기통은 너야.


"요즘은 진짜 그만두고 싶다. 버티는데도 한계가 온 것 같아 진이야. 네가 그렇게 장판 뜯고 난리 칠 때도 잘 버텼는데 그렇지? 나 그만두면 우리 진이 맛있는 것도 못 먹고 같이 놀러도 못 갈 텐데."


 진이는 무거운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읽었는지 그날따라 내 옆에서 얌전히 앉아서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4번째 맥주는 뜯으면서 잠자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진이가 너무 대견해서 사온 자극적은 소시지를 주기 전에 입을 맞췄다.


"미안해 진이야. 나는 평생 이렇게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빨리 돈 많이 벌어서 회사 안 가고 너랑 하루 종일 시간 보내는 게 꿈이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못난 주인 만나서 미안해."


회사 얘기를 실컷 쏟아내고 난 후 타깃을 옮겼다. 그날따라 잠자코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진이에게 더 미안한 마음이 생겨 내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남들이 봤으면 좀 진상 같아 보였겠지? 그렇지만 이 곳은 몇 년 동안 진이와 나 오롯이 둘만의 공간이었다.


"힘들면 그만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소시지를 질겅질겅 씹는 소리와 함께 무덤덤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진이야."


응?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낯설지 않았다. 진이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는 착각이 들어 강아지 배 밑을 들춰보고, 다시 티브이가 켜졌는지 확인했다. 혹시 핸드폰에 나도 모르게 전화가 걸려온 게 아닌지도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을 했지만 적어도 방금 들었던 한 마디는 진이가 한 말이 맞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진이야. 지금 네가 말한 거야?"

"응. 힘들면 그만해도 돼. 나중에 나 때문에 버텼다고 핑계 대지 말고 지금이라도 그만둬."


기대했던 상냥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리고 번뜩 든 생각은 진이가 외로움 때문에 지랄견이 된 게 아니었던 거다. 원래 성격이 좀 거칠었던 거였다.


"아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진이가 말을 하네? 검정 고무신 보고 배웠어?"

"무슨 소리야."

"아... 아니야"


원래 술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현실과 꿈이 구분이 안 될 만큼 취한 적은 없었는데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인 진이가 말을 하고 있다니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갑자기 창피해졌다. 내가 당황해하는 동안 진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고 너 밖엔 없어. 그런데 몇 년 동안 네가 매일매일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네 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나한테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진이는 퇴근하고 내가 하던 혼잣말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혼잣말이 아니지. 진이가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으니깐. 요 근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한계가 와서 평소보다 많이 징징대긴 했었다.


"내가 개라는 이유 때문에 네가 나한테 의지하지 못했던 거야? 우리가 함께 산 지 10년이 지났는데 넌 그저 나를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었어."


처음 듣는 진이의 목소리는 뭐랄까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뭐 10살이나 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나보다 많은 나이긴 하지.


"너는 내가 데리고 왔고, 주인인 내가 널 전적으로 보호하는 건 당연하지. 그러지 못했지만......"

"내가 사람인 너보다 부족하고 챙겨줘야 할 게 많지만 나는 애가 아니야. 힘들 때는 나한테도 의지해도 된다는 말이야."

"그래... 너는 개지 애는 아니었어. 하하하"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 농담이었지만 진이는 웃지 않았다. 사람과 개의 유머 코드는 다른가보다.


"일이든 사람이든 이유가 어찌 됐든 힘이 들 땐 나를 향해서 진심을 다해서 말하고, 내 앞에서 진심을 다해서 울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줄게. 내가 하는 말은 너 말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니깐 소문날까 봐 창피해할 필요도 없어."


강아지가 말을 한다는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는 잊힌 지 오래였다. 귀엽기만 했던 진이의 얼굴에서 근엄함이 보일 정도였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위로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면 될까?"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진이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진이는 더 이상 강아지가 아니었다. 친구였고, 형이었고, 가족이었다. 강아지에게 위로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잘 해내고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단순히 나를 키우고 싶어서 날 데려왔던 10년 전처럼 네가 하고 싶은걸 해. 10년 동안 날 키우느라 힘든 날이 많았지만 너는 절대 날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어. 속으론 어떤 마음을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행동하지 않았으니 너는 뭘 해도 포기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내가 보장할게."


진이의 말은 단호하면서 정확했다.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지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뭘 잘하는 지도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이제부터 찾으면 되지."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데."

"야이 사람아. 그게 지금 겨우 15~20년 사는 개 앞에서 할 말이야?


진이가 말을 한다면 귀엽고 애교 많은 목소리와 말투를 가졌을 거라 상상을 해본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런 상상이 완전히 부서졌지만 진이의 대답은 전부 나를 위한 진심이었다. 그 정돈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나한테 있어서 너는 가장 소중한 존재야. 겨우 개였던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줬으니깐. 그렇지만 널 위해 사는 건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라 그런 거지 너를 나보다 좋아해서는 아니야. 그러니깐 너도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너를 가장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아닌 너를."

 

진이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노래를 하고 싶으면 부르고, 글을 쓰고 싶으면 펜을 들고, 여행을 하고 싶으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떠나. 회사가 싫으면 그만두면 되고 그래서 돈이 없어지면 아끼고 살아. 나는 개니깐 집 앞을 여행해도 충분히 행복하고,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따뜻한 방바닥에 자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인생이야. 하지만 너는 사람이잖아? 나보다 더 멀리 더 자주 떠나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더 깊게 생각하고 살아야지."


나는 진이가 하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듣고만 있었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노교수가 젊은이들이여 세상은 넓고, 너의 인생은 길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까 소제지를 주기 전 입에 뽀뽀해줄 때부터 진이가 말을 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괜히 부끄러워졌다.


"언젠가 내가 행복을 찾아간다면 너는 어떡할 거야?"


한참을 진이의 말만 듣다가 내가 겨우 꺼낸말이었다.


"계속 네가 책임져야지. 멀리 여행 갈 때는 애견호텔이든 친구든 날 맡기고 가고, 돈을 못 벌게 되면 비싼 사료 말고 네가 먹던 음식을 주면 돼. 밖에 나갈 땐 불이랑 티브이 켜놓고 가는 건 잊지 말고. 매일 10분이라도 산책하는 건 까먹지 말고, 귀찮으면 그냥 밖에만 보내줘 나 혼자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내 인생은 그 정도면 충분히 행복해. 이제 네가 행복할 차례야."


 이 놈의 10살 먹은 강아지 정말 노련하다. 자신의 실리는 다 챙기면서 힘들었던 금요일 밤의 날 완벽하게 위로하고 웃게 만들었다.




                                                                                     ***



 진이가 사람의 내뱉었던 그 날이 꿈이었는지 진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로 몇 가지 변한 게 있다. 진이의 말대로 내 인생이 행복해지기 위해 뭔가 변화를 줬냐고? 아직은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았고, 행복을 찾아 여행을 떠난 건 아니어서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지만 부담감을 조금 덜어놓은 게 전부다. 언젠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회사가 편해졌다. 조금 일찍 퇴근해도 생각보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수많은 잔소리에 상처 받지 않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나의 생활은 크게 변한 게 없었지만 다시 보면 크게 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집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매울 것 같은 재료는 전부 빼고 요리를 했다. 훗날 행복을 찾아 떠나 돈이 없어질 날을 위해 먹고 남은 음식을 섞어 진이에게 건넸다. 평소 먹던 음식이 아니라 조금 주춤하는 진이의 얼굴에서 '아직은 회사 다니잖아. 왜 벌써부터 이러는 거야?'라고 말하는 게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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