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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터 Mar 12. 2024

2, 첫 인물화

                                                             (32개월)


  사랑이는 며느리 직장의 어린이집에 입소했다. 시설도 좋았고 선생들도 좋아 매우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사랑이는 처음부터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금세 아이들과 친해져서 마음이 놓였다. 활발하고 스스럼없이 다가가니 선생님들에게도 귀여움을 받는 편이었다. 

 아침에 등원은 며느리가 출근하면서 데리고 갔다가 하원은 6시 경에 남편이 퇴근하면서 데리고 왔다. 가끔 며느리나 남편의 시간이 안 맞거나 다른 일이 생기면 내가 땜빵을 했다. 차가 없는 나는 버스로 가야했는데 많이 둘러가는 버스였다. 그래서 차로 가면 십분이면 갈 거리인데 버스로는  삼십분이 넘게 걸렸다. 사랑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길도 버스를 탔는데 사랑이는 버스타는 걸 좋아했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그런 일들이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의 어린이집을 가는 시간이 즐거웠고 나를 보면 반겨 달려 나와 안기는 사랑이를 보는 게 행복했다. 이렇게 같이 아이를 키우며 대가족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동안 약속한 6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자 아들 내외는 2년 연장을 하면 안 될까를 물어왔다. 나와 남편은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아들은 자신들의 집을 새로 전세 계약을 했고 우리는 다시 2년이라는 시한부 대가족이 되었다.



 삼대가 한 집에 사는 동안 우리는 거의 갈등이 없었다.  며느리도 착하고 예의 발랐지만 내가 아들 내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도 도움이 되었을 거 같다. 

합가를 하고 처음에는 남편은 며느리를 가르쳐 내 집 식구를 만들라고 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살림의 지혜와 가풍을 배우는건 전통이니 그렇게 하는게 당연하다고 남편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늦게 늦게 가자고 했다.

 내가 무언가를 가르치면 며느리는 좀 더 빠른 시간에 일과 삶의 지혜를 배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계속 잔소리를 해야할 것이고 그러는 동안 고부간의 사이는 그만큼 불편해 질 수밖에 없다. 

나는 며느리가 스스로 깨닫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 눈에는 뻔히 보이는 시행착오들을 저지르는 걸 보면서도 인내심있게 참고 기다리다보면 며느리도 언젠가는 알게 된다. 

생각해보면 나도 지금 아는 것들을 며느리 나이 때는 몰랐다. 이만큼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 알게 된 것들인데 젊은 아이들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는 실수 역시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관하는 건 아니고 가끔 충고는 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 조심했다.

 집안일에는 아들도 동참 시켰다. 한 가족의 가장인 아들은 제 가족의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했다. 아직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일 어떤 갈등이 생기면 아들은 제 부모보다는 며느리의 편에 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들의 부모이고 며느리는 낯선 사람들과 결혼이라는 이유로 같이 살게 된거니 며느리를 지켜줄 사람은 아들이 되어야했다. 아들도 제 식구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 며느리가 사랑이를 돌보고 있으면 아들은 곧잘 설거지를 맡았고 나는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다정한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서두르지 맙시다. 그리고 며느리와 아들이 실수해 볼 기회를 줍시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사진을 보내왔다. 사랑이가 그림을 그렸는데 두 눈도 있고 코, 입. 귀까지 다 갖춘  제법 형태 있는 사람의 얼굴 모습이라며 그런 걸 그린게 기특해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이맘 때는 뭔 짓을 해도 안 신기할까. 똥을 눠도 신기하고 재채기해도 기특한데 와우~ 인물화를 그리다니. 

이것은 사랑이가 호작질에서 그림으로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그림이었다. 

나는 이 그림 사진을 뭉크의 절규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으로  오래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가 마음껏 낙서를 할 수 있게 칠판보드를 사주었다. 제한된 장소이다보니 사랑이는 벽에 낙서하는 것보단 덜 좋아했지만 그래도 가끔 칠판보드에 그림을 그렸다. 


                                                                (36개월)


36개월이 되자  그림이 좀 더 구체화되었다. 

눈동자도 생겼고 수염도 있었다. 아빠를 그린 거라고 했다. 머리카락도 잊지 않았다.

"아빠는 머리가 짧아요."

"맞아. 맞아!"

나는 머리가 짧다는 개념을 이해한 것만도 기특해서 미적분이라도 풀어낸 것만큼 호들갑스레 놀라워해주었다. 사랑이의 새로운 행동에 늘 과장적인 반응을 해주는 게 신이 나는지 사랑이는 내게 무언가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번에 그린 그림은 인물만이 아니라 신체 모두를 그려 팔과 다리도 다 있었다. 몸통은? 그것도 있었다. 이 그림은 얼굴이 곧 몸통인 매우 경제적인 그림이었다.  그래서 몸통과 잘 버무린 얼굴에는 귀도 있고 팔도, 다리도 사이좋게 다 같이 달려있다. 

눈이 왜 이리 큰가 했더니 안경 쓴 거란다. 

제 아빠의 특징을 나름대로 다 잡아내 그렸다.


 남자는 머리가 짧고 아빠는 안경을 꼈다. 그것은 사랑이에게 시작되는 어른 남자에 대한 첫 개념이었다.  사랑이가 태어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가족들이고 그것은 사랑이의 모든 세계였다. 가족들의 모습, 행동, 말투를 듣고 보고 관찰하며 아이는 그것이 정답으로 여기며 따라 하려 애쓰며 성장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자라나는 사랑이의 사랑스러운 시선에 책임감을 느껴야만할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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