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가족의 부탁으로 합가를 결정 하면서 가장 비상은 사랑이의 낙서였다
걸음마를 할 줄 알고 팔에 색연필을 쥘 힘이 생길 때부터 사랑이는 곳곳에 호작질을 하고 돌아다녔다. 닥치는 대로 끼적이고 다녀 그렇잖아도 좁았던 제 집 벽은 사랑이의 팔이 닿는 높이에는 성한 공간이 없었다.
가끔 방문했던 우리 집에서도 사랑이가 다녀간 후에는 여지없이 흔적이 남았다. 진작에 다 채워버린 자기네 집의 벽에 비하면 우리 집 벽은 사랑이에게 처녀지와 다름없었다.
사랑이의 호작질을 막으려 다른 종이를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사랑이는 금지된 장난에 스릴마저 느끼는 거 같았다. 심지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면 벽 앞에서 색연필을 들고 까닥 대고 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내가 안돼~ 소리치며 달려가면 에헤헤, 웃으며 순식간에 내 눈 앞에서 낙서를 해치우곤 했다.
이 귀여운 말썽쟁이를 워쪄.
그래서 합가가 결정되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위험한 짓 잘하고 저지레 심한 사랑이를 위해 가구마다 충격 완화 스펀지를 붙이는 거였고, 두번째로 한 일은 벽마다 사랑이의 팔이 닿을 높이만큼의 공간에 마음껏 호작질을 해도 되게 모조지를 붙여 주는 일이었다. 집은 좀 어수선해졌지만 흐뭇했다. 막기보다 사랑이의 예술혼을 불태울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니 이만하면 난 훌륭한 할미가 아닌가 스스로가 대견했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사랑이는 우리 집에 오자 신나게 낙서를 시작한 건 맞지만 내가 붙여둔 하얀 모조지 위가 아니었다. 사랑이가 공략한 곳은 모조지로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가릴 수가 없는 빈 공간들이었다. 이를테면 벽 모서리, 문설주, 문 틈새 같은. 모조지는 낙서의 공간이 아니라 찢거나 색연필 같은 걸로 찍어 구멍을 내는 용도로 썼다.
차, 창의적인 건가?
못하게 하면 사랑이는 더 신이 나서 그런 틈새를 찾아다녔고 쫓아다니며 지워도 보면 또 낙서가 그득했다.
톰과 제리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갑의 입장이고 덩치도 큰 톰과, 을의 입장이고 약한 제리의 싸움에서 톰이 이기는 일은 없다. 우리도 그랬다.
그러는 동안 벽지는 점점 너덜해졌고 나무 문에 그림이 겹쳐지고 또 겹쳐지니 잘 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랑이는 색연필이 아니라 사인펜을 쓰면 내가 더 질겁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 후부터는 아무리 감춰도 용케 찾아내 사인펜으로 호작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낙서일수록 사랑이는 더 뿌듯해하며 나를 불러 확인시켰다.
에헤헤,
웃는 사랑이의 웃음 앞에 결국 내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집 버리고 대신 사랑이의 창의력을 건지지 뭐.
근데 창의력이 맞나?
맞겠지......
*유아가 그리는 난화는 유아 본능적인 행위로 유아의 내면세계를 거짓없이 그려내는 표현수단이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아동의 자발적인 난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황재숙 임상미술치료전공 박사학위 논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