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퀄리티의 8할은 성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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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은 내용과 형태가 점차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겐 원서 읽기용 앱이라는 과제도 남아있었다. 녹음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퇴사를 한 후에 스스로 느끼는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사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이야기하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2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그 정도도 못할뿐더러 (악플도 인지도가 있어야 받는다), 대개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든가, 실제로도 간단한 일이긴 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못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체험했다. 그리고 이번에 또 그런 경험을 했다.
1화에서 썼듯이, 외국어 학습 앱을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3가지 데이터가 필요하다. 영문 텍스트와 국문 텍스트, 그리고 영문 오디오. 국문 텍스트는 번역가의 산출물을 토대로 교정 등의 작업을 해야 하지만, 영문 오디오는 성우의 녹음 파일이 그대로 사용된다. 그러니 성우만 찾으면 쉽게 끝날 일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외국인들에겐 영어가 모국어이니 말 그대로 ‘외국인 아무나 섭외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안일한 생각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생각이었다 :)
성우를 찾을 때의 제1조건은 미국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영국 발음은 교육 콘텐츠로서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이나 호주 출신의 외국인은 배제했다. 제2조건은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용 이야기도 오고 가니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없으려면 그쪽이 수월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진흥원에서 직접 연락하는 케이스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한국어 의사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비정상회담 패널들 중심으로 찾아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는 국가별로 1명씩 섭외하기 때문에 막상 미국인이 (게스트 포함해서) 3~4명에 불과했다. 타일러는 이쪽 업계에서 넘사벽의 존재감이고, 마크 테토는 기업인이니 오디오북 성우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주로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케일라 토리슨이라는 미국인을 찾게 됐다.
단순히 한국어 잘하는 미국인이 아니라, 국내에서 성우로 활동하고 있고 EBS 교육방송에도 출연하고 있으니 최고의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와 아내 모두 유튜브에서 목소리를 딱 듣자마자 바로 “와..” 감탄사가 나왔다. 미국인한테 영어 발음 좋다는 이상한 소리도 곁들이면서. 너무나 적합한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연락해도 답이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빠르고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줘서 섭외는 무사히 마쳤다. 자, 이제 어디서 녹음을 해야 하나.
평생 녹음실 근처도 가본 적이 없었다. 시세도 모르고, 왜 가격 차이가 나는지도 몰랐다. 뭐든지 최저가를 찾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는지, 1시간에 5000원이라고 광고하는 셀프 녹음실에도 눈이 갔고 팟캐스트 녹음용이라는 곳에도 시선이 끌렸다. 노래를 하는 것도 아니니 이 정도 시설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멋대로 판단하기 전에 이쪽 분야에서 사업을 하시는 분에게 문의를 했다.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가수가 녹음하는 공간과 프로듀서가 프로듀싱하는 공간이 나뉘어있고, 녹음실 대여할 때 엔지니어 비용도 포함된 옵션을 선택하란다. 그래서 강남역의 한 녹음실로 예약을 해서 진행을 했는데, 역시 경험자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 엔지니어 없이 셀프 녹음실에서 했으면 성우와 함께 멘붕 상태로 아무것도 진행을 못 했을 거다.
세상에는 셀프 녹음실이란 것도 있고, 나름 컴퓨터 짬밥도 좀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절대 아니다 :) 적어도 이런 퀄리티의 음성 파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엔지니어가 필요하다. 이틀 동안 6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업을 해주셨는데 정말 친절하게 해 주신 대표님과 녹음 중에는 조용하다가 녹음이 끝나면 짖는 신통방통한 시바견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우를 알아볼 때 “그냥 외국인이면 다 되는 거 아닐까” 했었는데, 성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평소 우리의 독서 패턴을 생각해보면 100~15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쉬지 않고 읽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으면서 대화 내용에 따라 감정을 싣는 것은 어려운 일인 데다, 강한 체력과 긴 시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소설이라서 등장인물도 많고 글만 보면 이 대화의 화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혹은 그 옆의 다른 남자인지 바로바로 캐치가 안 될 때가 많다. 그런데 성우는 달랐다. 어떻게 그리 빨리 파악을 하고, 그 캐릭터로 전환이 되는지 신기할 정도.
총 3~4시간 분량의 파일을 만드는데, 녹음은 6시간 넘게 이뤄졌다. 문학 작품이라서 평소 안 쓰이는 단어들도 많이 들어가서 발음이 어려운 부분도 많고, 성우 스스로 판단하기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직접 재녹음을 요청해주기도 해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물론, 3~4시간 분량을 만드는데 3~4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한 내 예측이 잘못됐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앞서 진흥원의 지원을 받을 때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 수 있도록 성우의 한국어 실력을 고려했었는데, 결론만 말하면 성우 비용은 진흥원 지원을 받지 못했다. 성우가 업체 소속이 아닌 프리랜서였기 때문이다. 제작비를 관리하는 입장에서 제작비가 적게 들 수 있도록 성우 업체를 알아보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케일라 님과 작업을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번 만든 콘텐츠는 계속 가는 법인데,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어서 후회가 없다.
이틀 동안 빡세게 녹음을 한 끝에 결과물이 잘 나왔다. 잠깐 책 만들기에서 외도 아닌 외도를 했는데, 다시 책 만들기로 돌아가 아주 아주 큰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바로, 제목과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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