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 같은, 여름의 맛
토마토 쓰케모노つけもの를 처음 알게 된 건 한 라멘집에서였다. ‘쓰케모노’라는 글씨의 조합이 잘 읽히지 않아 조용히 입을 떼 작은 소리로 따라 읽었다. 그 밑에 화이트 와인 시럽에 절인 토마토라는 설명을 보고서야 어떤 요리로 나오는지 겨우 가늠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편인데도 입맛은 꽤 보수적이라 새로운 음식을 선뜻 시도하지 못한다. 자주 먹던 메뉴를 선택하면 뭘 먹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할 에너지를 줄일 수 있을뿐더러 주어진 한 끼를 실패 없이 챙길 수 있으니 나름의 소신이라고 스스로를 타협했다.
이런 내가 어쩐 일로 이름도 생소한 쓰케모노를 덜컥 주문하고야 말았다. “주문할게요. 여기 쓰케모노 하나랑 돈코츠 라멘 두 그릇 주세요.” 아마 자연스레 토마토 위에 설탕이 솔솔 뿌려진 맛을 떠올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에 여름방학이 찾아오면 엄마는 이따금 설탕 토마토를 만들어주곤 했다. 냉장고에 미리 넣어둬 차가워진 토마토를 도톰하게 썰어 넣고 그 위에 황설탕을 골고루 뿌려주면 끝이다. 토마토를 뒤적뒤적 섞을 때마다 설탕 알갱이가 스테인리스 볼에 서그럭 서그륵 부딪힌다. 그 소리가 꼭 모래알 같이 느껴졌다. “잘 저어서 먹어” 엄마가 건네 준 토마토를 선풍기 앞에 가져다 두고 동생들과 둘러앉아 각자 숟가락으로 토마토를 떠먹었다. 스테인리스 볼에 담긴 토마토는 포크가 아닌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제맛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마토 과즙에 설탕이 충분히 녹아 달짝지근한 국물이 생긴다. 단단한 토마토가 설탕과 만나 부드러워지는 그 식감이 좋았다. 달달한 토마토 국물까지 호로록 마시면 이 달콤함으로 한여름 더위쯤은 당당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푸른 녹음이 지고 푹푹 찌는 더운 공기가 밀도 있게 느껴지는 날이면 선풍기 바람을 쐬며 먹는 설탕 토마토를 떠올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짝지근한 설탕 토마토와 여름은 가장 잘 어울리는 간식이 아닐까. 뭐 설탕과 토마토의 관계가 몸에는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손실된 비타민은 맛의 즐거움으로 채우고 있으니 건강 생각은 잠시 잊어둬야겠다. “토마토 쓰케모노 먼저 준비해드릴게요.” 작고 투명한 유리볼에 주먹 반절만 한 토마토가 담겨 나왔다. 생각보다 소박해 유리볼을 한참 바라봤다. 껍질을 벗겨 놓아 그런지 아니면 곁들여 올라간 민트 잎의 상큼함 때문인지 유독 더 새빨갛게 보였다. 먼저 그릇의 반쯤 채워진 시럽을 호로록 마셔보았다. “어? 이거 무슨 맛이지? 되게 맛있다!” 설탕 토마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향긋한 화이트 와인의 풍미가 더해져 그런지 달콤한 토마토에서 왠지 모르게 낯선 풍미가 느껴졌다. 익숙한 듯 낯선 맛. 오랜만에 경험하는 새로운 맛이었다.
열 십(十) 자 모양으로 칼집을 낸 토마토를 네 등분으로 완전히 떼어내 한 조각을 먼저 입에 넣었다. 쫄깃해진 토마토를 꾸욱 씹으니 시럽이 배인 토마토 즙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토마토, 설탕, 와인이 조화롭게 입안에 퍼졌다. 화이트 와인의 향을 더 오래 즐기고 싶어 날숨을 코로 길게 품어 냈다. “흐음~” 나도 모르게 허밍이 되어 감탄사가 나왔다.
이후 집에 돌아와 다시 찾아보려 하니 도통 생소한 그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먹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맛과 이름을 잊고 싶지 않아 먹는 내내 머릿속으로 이름을 되뇌었는데, 집에 오자마자 단어 한 자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식당 이름을 검색해 여러 블로그를 찾아본 후 그 메뉴가 “쓰케모노”라 는 사실을 알았다.
쓰케모노는 일본에서 채소를 된장이나 소금, 쌀겨, 간장 등에 절여 놓은 저장식품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일본식 장아찌인 셈이다. 장아찌라 하면 입맛이 없을 때 생각나는 짭짤한 뒷맛이 개운한 밥반찬만 떠오르는데, “이 달콤한 디저트가 장아찌라니.” 짐작한 것과 한참 다른 토마토 쓰케모노의 정체와 무한한 저장식품의 세계에 적잖이 놀랐다. 철마다 만들던 복숭아 조림이나 밤 조림이 떠올랐다. “아! 그럼 이 병조림들은 서양 장아찌인 거잖아!” 설탕 시럽에 조려 만든 콩포트와 시럽에 식초를 넣어 만드는 피클도 한 맥락의 음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양한 식재료를 비슷한 조리법으로 만들어 즐기다니.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쯤 제대로 일본식 토마토 절임인 쓰케모노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본 사이트를 열심히 찾아 레시피 서너 개 정도 찾았다. 물과 식초, 설탕을 넣어 새콤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레시피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 놓은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보았다. “켁켁켁켁” 식초의 신맛 때문에 기침이 절로 나왔다. 산도를 조절해 채소의 보존력을 높였을지는 모르나 그날 먹었던 쓰케모노의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통 그 맛을 구현해낸 레시피를 찾을 수가 없어 더듬더듬 그 맛을 떠올렸다. “화이트 와인, 설탕, 허브, 식초 조금.” 바로 마트로 달려가 화이트 와인 한 병과 방울토마토를 사 들고 작업실로 왔다. 큰 토마토를 살까 하다가 톡 터지는 질감과 한입에 넣었을 때 토마토의 달짝지근한 맛, 화이트 와인과 허브의 상큼한 맛, 식초의 깔끔한 맛을 조화롭게 느끼고 싶어 방울토마토를 선택했다. 물론 방울토마토는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맛의 즐거움을 위해선 작은 수고스러움은 참을 수 있다. 시럽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당과 수분의 조절인데, 오래 두고 먹을 것이 아니었기에 굳이 일반 레시피 기준인 과일과 설탕의 1:1 비율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나름의 레시피를 찾기 위해 여러 번 반복하며 많은 쓰케모노를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달콤하고 향긋한 토마토 쓰케모노를 완성했다.
작은 종지에 서너 알을 꺼내 담았다. 먹기 아까울 만큼 고운 디저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입 맛보니 참말로 그 날 맛본 향긋한 쓰케모노의 맛이 났다. 너무 통쾌했다. “그 맛을 찾아내다니!” 이후 더운 여름이 되면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둔 쓰케노모 생각이 절로 난다. 퇴근 후 혹은 늦은 밤 꺼내 먹는 여름 단골 간식으로 제격이다.
여름이 전하는 말
토마토에 달콤한 시럽이 스며들 수 있도록 껍질을 벗겨 쓰케모노를 만든다. 토마토 엉덩이에 열십(十) 자로 칼집을 낸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칼집을 낸 부위에 껍질이 일어나면 바로 건져내 차가운 얼음물에 담그고 껍질을 벗겨낸다. 푹 익으면 흐물흐물해지니 살짝만 데쳐 건져내는 것이 포인트!
업그레이드 설탕 토마토, 쓰케모노
달달한 설탕이 스민 토마토도 좋지만 화이트 와인과 달콤한 설탕이 함께 들어간 향긋한 토마토 조림을 만들어보자. 사이드 메뉴나 간단한 술안주로 즐기기에 좋다.
재료 방울토마토, 물 250g, 화이트 와인 250g, 설탕 300g, 타임 3~4줄
조리순서 ❶ 냄비에 물, 화이트 와인, 설탕을 넣고 끓인다. ❷ 설탕이 모두 녹을 때쯤 불을 끄고 타임을 넣고 한 김 식힌다. ❸ 2에 담긴 허브를 빼고 한 번 더 끓인다. ❹ 껍질을 벗긴 토마토를 소독한 병에 차곡차곡 옮겨 담은 후 뜨거운 시럽을 붓는다. ❺ 바로 뚜껑을 꽉 닫아 잠근 다음, 냉장고에서 3일 숙성 후 꺼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