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가을의 맛
펄펄 끓어대던 여름이 하루 사이에 잠잠해졌다. 예기치 않게 불어온 쌀쌀한 바람이 이내 가을을 몰고 왔다. 이날을 기점으로 두세 번의 태풍이 오갔고 일교차도 낮의 길이만큼 점점 더 벌어졌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조리 말라죽일 기세로 들끓었던 여름엔 어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고 안달했는데 막상 아침저녁으로 입김 서린 찬 공기가 살갗에 닿자 벌써 겨울이 걱정이다.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재채기 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간질거리는 코를 좌우로 정신없이 비비고 나면 절제할 타이밍을 놓쳐 간혹 코피가 날 때도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일교차에 취약한 사람이 되었다. 고질적인 비염과 추위에 맥을 못 추리는 체질 탓에 이맘때엔 월동준비를 단단히 해두어야 한다. 막힌 코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방치하다 보면 귀까지 먹먹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그때쯤부턴 현실감이 급격히 떨어진다. 비염 증세가 점점 심해져서일까. 오늘은 좀처럼 업무에 효율이 나질 않는다. 추석 시즌 내내 선물용 제품 준비를 하기 위해 한창 열 올려 일해온 터라 기력이 더 쭉 빠진 느낌이다.
“날도 쌀쌀해졌는데 쌍화차 한잔하러 가야지!”
추석을 준비하는 내내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직이다. 더 미뤄두기 애매한 몸 상태를 맞이하고서야 이참에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두어 시간 더 앉아 있는다고 대단히 능률이 오를 것도 아니기에 다들 후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 번씩 이런 날도 있어야지. “ “그래! 쌍화 한잔하면서 충전 좀 하자!” “오, 드디어 마시러 가는구나! 신난다.” 오후 다섯 시, 벌써 해가 뉘엿하게 저물어간다. 해가 지면서 동네 풍경이 점점 붉게 물들였다. 걸어가는 골목 끝에 해가 걸터 있어 유독 눈이 시리고 부셨다. 한낮과는 또 다른 해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이 시간에 퇴근하니 좋다.” 햇빛이 새삼스럽다.
오늘 가는 곳은 충무로역에 있는 오래된 전통찻집이다. 역에서 나와 두 블록쯤 걷다 좁은 골목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내 나이보다 한참은 더 된 인쇄소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전신주 전선은 이미 엉킬 대로 엉켜 있고 그을음과 잿빛이 곳곳에 배어 있는 미로 같은 곳이다. 그럼에도 골목은 역동적이다.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기계가 여태 돌아가고 작업자들은 막바지 작업에 분주한 듯 보였다. 찻집이 나올까 싶은 의심은 넣어두고 길목을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한방찻집’이라 정직하게 쓰여 있는 가게 입구가 나타난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먼지 먹은 카펫 계단을 오르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딸랑이는 문을 열며 우리가 왔음을 알린다. “안녕하세요.” 반가이 인사를 건네면 까만 앞치마를 단정히 두른 사장님이 자리를 안내해 주신다. 작년, 설 시즌 신제품으로 전통차를 소개하기 위해 이것저것 연구하다 을지로가 쌍화차의 성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쌍화차를 맛있게 마셔본 경험이 없다 보니 맛의 기준을 세우기 어려웠고, 막연했다. 아무리 책과 자료를 뒤져보고 자문을 구해도 맛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건 내 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 감각을 깨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한겨울 추위를 비집고 퇴근길마다 을지로로 향했다. 어떤 다방은 계란 노른자를 띄워 주고 또 어떤 다방에선 말린 대추, 잣, 호박씨, 땅콩, 참깨를 올려주는 곳도 있었다. 사장님의 취향에 따라 쌍화차에 올리는 고명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다 이 한방 찻집을 발견했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사장님의 반응이 유독 귀여우셨다. 대체 어떻게 여길 알고 왔냐며 놀라워했다. “어머, 애기네. 젊은 사람들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대요?” “안녕하세요. 쌍화차 마시러 왔어요!” 이곳의 쌍화차에는 계란 노른자가 올라가지 않지만 옛 방식 그대로다. 계란 노른자가 들어간 쌍화차는 유독 더 어렵다. 자칫 노른자가 터지면 비릿해진 잔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 와중에 찻숟가락의 둥근 등으로 노른자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마시는 재미가 있다.
“사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쌍화차에 계란 노른자를 왜 띄우는 거예요?” “몸보신하라고 띄우죠.” “몸보신이요?” “옛날에는 풍족하지 않아서 제대로 끼니를 못 챙길 때가 많으니까, 단백질 보충하라고 한 알씩 넣어준 거죠.” 옛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쌍화차 위의 전설을 듣고는 대단한 사실을 알게 된 것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살뜰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고 보니 까만 쌍화에 둥둥 떠 있는 노른자가 한밤의 보름달처럼 다정해 보였다. 계란 노른자 한 알에 참말로 보신이 되겠냐만 그리되길 바라는 마음을 알아채고 나니 한 모금 한 모금 마실 때마다 힘이 나는 것 같다. 그때 함께한 이들과 약속했다. “한 번씩 기력 떨어질 때 여기서 쌍화 타임 할까 봐요!” 호기롭게 외쳤지만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날 이후 마치 복날에 삼계탕을 먹고,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처럼 우리는 찬 바람이 불어오면 쌍화차를 떠올리곤 했다.
사장님이 안내해주신 자리에 앉았다. 옆 테이블엔 먼저 온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쌍화차를 나누고 계셨다. 겉옷을 벗어 정리하고 자리 정리를 마치니 사장님은 따뜻한 보리차를 내어 주셨다. “뭐 드릴까요? 쌍화차, 십전대보탕, 인진쑥차 이렇게 세 개만 있어요.” “저희 십전대보탕 두 잔이랑 쌍화차 한 잔 주세요.” 사장님은 바로 주방으로 가 가스레인지에 탕 주전자 두 개를 올 려 뜨겁게 끓여냈다. 사장님의 어깨너머로 눈동냥을 하며 차 만드는 과정을 배웠다. 당시엔 내심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괜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넓은 찻잔에 잣, 호박씨, 채 썰어 말린 대추를 띄워 쌍화탕과 십전대보탕을 내어 주었다. 그리고 인진쑥환과 편강(얇게 저며서 설탕에 조린 후 말린 생강) 그리고 구운 땅콩도 함께 나온다. “인진쑥환은 티스푼으로 한 스푼 정도 떠서 입에 털어 넣고 물로 넘겨 먹어요. 배를 따뜻하게 해 줘요. 이 하얀 건 편강이라는 건 데요. 쌍화탕이 좀 씁쓸하잖아요. 한 모금 마시고 하나씩 씹어 봐요. 향긋하니 좋아요.” “네! 고맙습니다.” 보신하는 마음으로 차 위에 곱게 떠 있는 고명을 먼저 꿀떡 넘기고 찻잔을 홀짝홀짝 비웠다.
쌍화차를 마시면 점차 속에서부터 열이 오른다. 차가웠던 손끝, 발끝에 온기가 돈다. 자연스레 마음도, 웅크린 어깨도 열리는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불필요한 힘을 빼서인지 여력이 좀 생긴다. 쌍화(雙花)는 ‘둘이 화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뜻이 몸과 마음이 화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보았다. 데워진 온기가 뭉친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낸다. 먼저 산 이들의 지혜가 이 한 잔에 담겨 있다.
가을이 전하는 말
경동약령시장에 가면 쌍화차를 가정에서 쉽게 만들 수 있도록 한약재를 모아 한 팩씩 소분해서 판매한다. 이것을 냉동해 두었다가 한 번씩 끓여 마시면 환절기에 도움이 된다.
쌍화차가 있는 을지로 다방
의외로 아직 충무로나 을지로 근방에는 ‘다방’이 꽤 남아 있다. 진입장벽이 높긴 하지만 그래도 꽤 좋은 곳들이 있어 소개한다.
의전방 서울 중구 마른내로2길 25
을지로에서 발견한 쌍화찻집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고형으로 맛을 낸 다른 쌍화차와는 달리 약탕기에 오랜 시간 내린 쌍화차를 판매한다. 고형으로 맛을 낸 쌍화차에 비해 달콤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쌍화차를 즐기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을지다방 서울 중구 충무로 72-1
을지다방은 워낙 유명해져서 젊은 이들도 제법 드나드는 다방이다. 이곳의 쌍화차엔 노른자와 고소한 고명이 많이 올라가 담음새가 참 예쁘다. 달콤한 쌍화차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