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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리 Sep 16. 2019

하얀 카레와 컵라면

깊어진 밤에 함께하는, 겨울의 맛


포근포근 눈밭을 걷는 기분이야

하얀 카레와 컵라면


작업실 오픈 준비를 하려 아침부터 부산을 떨고 있는 중에 단골손님이 찾아왔다. ‘똑똑’ 소리에 잠깐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워낙 가깝게 지내게 된 터라 반가운 마음에 쓸던 비를 벽에 세워 놓고 부랴부랴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아직 오픈 전이죠? 잠깐 들어가도 돼요?” 

“그럼요. 들어오세요.” 


그녀는 늘 들고 다니는 장바구니에서 녹색 천으로 싼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세히 보니 별이 총총 박힌 키치한 녹색 손수건이었다. 


“이게 뭐예요?” 

“하얀 카레를 좀 만들었는데, 혼자서는 다 못 먹을 것 같아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하얀 카레요?”

“네. 유학 시절에 일본인 친구에게 배운 레시피인데, 생각보다 담백하고 맛있어요. 냄비에 살짝 데워 따끈하게 해서 먹어요. 전 출근해야 해서 이만 갈게요.” 

“진짜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손수건을 풀어보니 흰 사각 법랑 통에 이름만큼 생소한 하얀 카레가 가득 담겨 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난 방울토마토 서너 개 와 파릇한 브로콜리 그리고 감자와 닭 가슴살이 뽀얀 하얀 카레 위에 잘 담겨 있다. 흰 카레의 모양이 너무 예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모르긴 몰라도 따로 데쳐내 채소의 존재감을 각각 살릴 줄 아는 그녀는 사려 깊은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버렸다. 동네에 정 붙일 만한 구석이 생긴 것만 같아 든든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언제 저 하얀 카레를 열어 밥을 챙길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따끈하게 데운 카레를 쓱쓱 비벼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타이밍만 엿보다 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 마감 시간이 되고야 말았다. 이미 서너 시간 전부터 배가 고팠던 터라 보자기를 다시 열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보통 가게 정리를 한 시간 정도는 하는데 이날만큼은 삼십 분 만에 정리를 마치고 식사를 준비했다. 사람이 없는 공간은 불을 끄고, 주방 위 테이블 위 전등만 켜 놓았더니 종일 복작거렸던 공간이 단숨에 차분해졌다. 완전한 우리만의 시간이 되었다. 이제 밥을 먹을까 하는데 다시 누가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퇴근길이라며 그녀가 다시 들렀다


“카레 먹어 봤어요? 퇴근하는 길인데 가게 불이 켜져 있기에 통 찾으러 왔어요.” “우리 이제 먹으려던 참이었어요. 식사 안 했으면 같이 먹을래요?” “아! 그래도 돼요?” “아휴, 당연하죠!” 테이블이 갑자기 부산해진다. 컵라면 두 개, 즉석밥 두 개, 낮에 갔던 김밥집에서 사장님이 넉넉히 담아주신 깍두기, 하얀 카레까지 가득 식탁을 채웠다. 야밤에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즉석밥 위에 연기가 폴폴 올라오는 하얀 카레를 두 숟가락 정도 얹어 숟가락 끝으로 살살 비볐다. 크게 한 입 떴다. 보드라운 우유와 고소하고 짭조름한 치즈가 뜨거운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껍질을 까서 데친 부드러운 방울토마토, 적당히 데쳐 아삭한 브로콜리, 부드러운 닭 가슴살, 포슬포슬한 감자까지 하얀 카레와 잘 어울렸다. 완벽한 퍼즐을 맞춰낸 듯 묘한 통쾌함이 들었다. 하얀 카레만 떠먹기엔 심심한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치즈의 고소함에 덧대 낮에 김밥집 사장님께 얻어온 깍두기가 잘 어울렸다. 게다가 컵라면까지 곁들였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녀에게 물어 알아낸 하얀 카레 레시피는 이랬다. 사실 고형 또는 가루 카레가 들어 있지 않아서 카레라고 부르는 게 어색했다. 좀 더 요리의 모양새로 보면 스튜에 가깝다. 그런데 쇠고기나 토마토 페이스트를 쓰지 않는 만큼 스튜라고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렇다고 ‘하얀 카레’ 말고 붙일 만한 별다른 이름이 없었다. 만드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선 브로콜리와 방울토마토를 살짝 데친다. 방울토마토는 껍질을 벗겨 주는데 미리 열십(十) 자 모양으로 칼집을 넣어두면 좋다. 끓는 물에 일 분 내외만 넣어도 바로 칼집 낸 부분이 뒤집어져 편하게 벗겨낼 수 있다. 방울토마토가 열기를 품어 뜨거우니 조심해야 한다. 토마토 껍질을 벗긴 다음에는 찬물이나 얼음물에 얼음 샤워를 시켜 잔열에 토마토가 푹 익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모양도 유지되고 씹는 맛이 적당하다. 


나머지 재료는 다른 카레가 그렇듯 ‘집에 있는 재료’가 덧대진다. 카레를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결정했다면 구태여 새로 장을 보지 말고 지금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꺼내자. 먹고 남아 있는 감자, 양파, 닭 가슴살도 좋다. 냉장고 구석에 숨어 있던 당근도 이럴 때 함께 나온다. 양이 너무 넘치지 않게 준비한다. 닭 가슴살을 사용할 예정이라면 우유에 한 시간 내외로 재워두면 좋다. 닭 비린내를 잡는데 우유만 한 게 없다. 간단한 과정이지만 맛을 채우기 위해서는 넉넉한 시간과 작은 노하우들이 필요하다. 


재료가 전부 준비됐다면 이젠 팬에 집중할 차례다. 우묵한 팬 에 버터를 넉넉하게 덜어 녹인다. 깍둑깍뚝 썰어둔 감자와 양 파, 우유에 미리 재워 둔 닭 가슴살을 준비한다. 하지만 팬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건 언제나 양파다. 양파를 갈색이 될 때까지 넉넉하게 오래 볶아준다. 팬의 종류나 열에 따라 다르지만 이 삼십 분 정도 졸아들 때까지 볶는다. 주물 팬이 양파의 당화 과정이 빨라지도록 돕지만, 집에 있는 어떤 프라이팬도 실은 괜찮다. 버터를 좀 과하다 싶게 넉넉하게 둘러주는 게 팁이다. 양파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갈색 빛을 띠면 그때 단단한 채소 순으로 넣어서 볶아준다. 이날은 감자, 닭 가슴살 순으로 넣어 볶았다. 채소들이 노릇하게 글레이즈 되면 물을 넣고 센 불에 이십 분 정도 끓여준다. 물이 한소끔 끓어오르면 불을 한 번 끄 고 둥둥 떠다니는 거품과 부유물을 건져낸다. 깔끔한 뒷맛의 핵 심이다. 


어느 정도 부유물 정리가 되면 우유를 물의 반 정도 넣고 한 방향으로 휘휘 저어준다. 이때 불이 너무 세면 우유가 응 \고되어 덩어리가 되니 마지막은 약불에 맞춰두어야 한다. 어느 정도 보글보글 끓으면 완성이다. 담아내기 직전 불을 끄고 데친 브로콜리와 토마토, 치즈를 취향대로 담아내면 된다. 십 년 전 일본인 친구에게 전해 받았다는 언니의 카레 레시피가 나에게까지 왔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누군가의 피곤을 달래주는, 오늘 나의 하얀 카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낭만적이었다. 빵빵하게 부른 배 때문인지, 늦은 밤 낭만이 더해져서인지 포근포근한 하얀 눈밭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맛본 하얀 카레는 이런 맛이었다.



겨울이 전하는 말

껍질을 벗긴 양파는 냉장고에 보관하더라도 빨리 물러지기 때문에 소량으로 보관하고, 오래 보관을 원 할 경우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신문지로 하나씩 싸서 밀폐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겨울에는 베란다나 차가운 곳에 놓으면 양파가 얼수 있기 때문에 소분해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포근한 하얀 카레 

카레는 양파의 당화 과정이 핵심이다. 잘 볶아지도록 양파를 채 썬 다음 갈색 빛이 돌 때까지 볶아준다. 30분 이상은 볶아야 한다. 타는 게 아닌가 싶을 때까지 볶아야 양파의 단맛이 올라온다. 


재료 방울토마토 5개, 양파 1개, 감 자 1개, 브로콜리 1개, 닭가슴살 200g, 버터 1큰술, 물 400ml, 우유 200ml 조리순서 ❶ 브로콜리와 방울토마토는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1 분 30초 데친다. ❷ 양파와 감자는 한입 크기로 깍뚝 썰기한 다. ❸ 재료를 다 넣어도 반 정도만 찰 수 있게 큰 프라이팬을 준비해 버터와 양파를 넣고 30분 이상 볶아 글레이징 한다. ❹ 단단한 야채 순으로 같이 볶은 다 음, 물을 넣고 끓인다. 끓이는 동 안 부유물을 국자로 걷어낸다. ❺ 잘 익었다 싶으면 우유를 넣고 좀 더 뭉근히 10분 이상 끓여준다. 이때 국자를 한 방향으로 젓는다. ❻ 잘 담아낸 뒤 방울토마토와 브로콜리를 취향껏 얹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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