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아! 물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네.” 엄마는 외출 후 돌아와 물 한 잔을 다 들이켜고선 습관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꼭 옆에 서서 토를 달았다. “아무 맛도 없는데 뭐가 맛있다 는 거야?” 맛 자체가 부재한 무無 맛에 “맛있다” 말하는 엄마를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스물두세 살쯤, 대여섯 시간에 걸쳐 칠갑산 등반을 한 적이 있다. 뙤약볕 내리쬐는 팔월 한여름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무리한 산행이었다. 열 명 정도 오르기 시작해 중간중간 낙오자가 생겨 고지에 가까워졌을 때쯤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세 사람 중엔 나도 있었는데, 사실 하산할 타이밍을 놓쳐 우물쭈물하 다 고지로 가야만 하는 선택지 없는 상황에 놓인 탓이었다. 바위산은 처음이라 몸을 낮추고 땅에 기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산행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다. 바지며 티셔츠가 흙먼지 범벅이 되고 머리끝에 송골송골 맺힌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려 목에 두른 손수건을 이마에 옮겨 둘렀다. 계속되는 산행에 갈증이 많이 났지만 물을 한 번에 벌컥벌컥 마시면 탈수 증상이 온다기에 한 모금으로 겨우 목만 축이며 걸었다.
“어? 나 물이 없어! 어떡하지?” “나도 진작에 다 마셨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나름 아껴 마신다고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도 정상에 다다를 때쯤엔 다들 물이 똑 떨어지고 말았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 배출되는 땀의 양이 평소보다 많다 보니 더 심하게 갈증을 느꼈다. 정상에 가까워졌을 때쯤 목이라도 축일 요량으로 지나는 어르신께 물 한 모금을 부탁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 실례지만 물 한 모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나. 나도 하산하면서 마실 물밖에 없어서… 아이고 미안해요.”
하는 수없이 갈증을 참고 정상에 올라야만 했다. 오르는 내내 오로지 물 생각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올랐다. 올랐다는 쾌감 때문인지 잠깐 갈증이 잊혔다. 부는 바람이 미지근한데도 땀이 식자 시원하게 느껴졌다. 사진 한 장씩을 남기고 다시 서둘러 하산을 했다. 정상까지 작은 봉우리를 하도 오르락 내리락해서인지 하산 길은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다. “편의점이다!” 산 입구에 있는 편의점을 발견하고는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 “살았다!”를 외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딛다 보니 무릎이 자꾸 접혀 넘어질 것 같았다.
차가운 물을 큰 모금으로 벌컥벌컥 마시는데 절로 찬사가 터져 나왔다. “와! 물이 진짜 세상에서 제일 맛있네!” 필요를 충족하는 가장 완벽한 맛이었다. 엄마가 말한 그 맛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날 이후 무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차가운 물 한 잔을 꼭꼭 씹어 마시며 생각한다. 어떤 맛도 존재하지 않는 가장 순수한 맛의 물을 씹어 삼키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과 부스러기들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간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면 안일해진 신경들이 반응하고 정신은 차차 또렷해진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