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한 겨울밤에 꺼내먹는 달착지근한 가을의 맛
설탕 코팅을 입혀 ‘빤딱빤딱’ 빛나는 밤 조림을 가만히 바라본다. 햇밤이 막 나올 때 한가득 사서 달콤하게 조려두었다가 소복하게 눈 오는 겨울밤 조심스레 한두 알 꺼내 맛보면 딱 좋다. 이 치명적인 병조림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였다. 이 영화는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봄과 겨울’은 ‘여름과 가을’ 편의 후속작이다. 영화는 주인공 이치코가 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고향에서 함께 살던 엄마는 언젠가 갑자기 쪽지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고, 이치코는 그 후 도시에 나갔다가 엄마가 없는 시골에 돌아와 혼자서 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영화는 이치코가 돌아온 일 년을 보여준다. 원작은 만화인데, 만화에서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사계절 내내 식재료를 직접 키우거나 캐거나 주워, 튀기고 굽고 찌고 졸이고 절이고 말린다. 손수 씨를 뿌려 수확한 작물로 끼니를 챙기는 이치코의 일상과 그 과정에서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마음을 켜켜이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 못지않게 계절의 변화를 음식으로 느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워낙 정적이라 별다른 사건 없이 일상이 흘러가는 듯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군침이 돌거나 출출해져 몸이 자꾸 반응하게 된다. 도톰한 스웨터를 입고 난로 앞에 앉아 지난가을 준비해둔 밤 조림을 야금야금 꺼내먹는 이치코를 보고 있자니 나 역시 어서 빨리 겨울이 왔으면 하고 조바심을 내게 된다. 봉인된 가을 음식을 눈 내리는 한겨울에 꺼내먹는다고 생각하니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또 금세 잊기 마련이다. 그렇게 햇밤 욕심은 영화가 끝나면서 슬쩍 잊혔다가 가을 한복 판 농산물 시장에 햇밤이 출몰한 것을 보고서야 다시 기억났다. 영화에서 본 밤 조림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좀 크게 나왔다. “어? 밤이네?” 내 말을 들은 상점 주인이 바로 말을 받아준다. “밤 깎아줘?” “네? 아… 네!” 밤 조림이 불현듯 떠올라 밤 한 망을 샀다. 얼결에 사버린 밤을 가게로 가져와 한참 바라봤다. 어차피 벗겨낼 껍질이니 먼저 탈곡을 하고 나면 훨씬 밤 조림이 수월할 것이라 가늠했다. 밤 중에는 껍질이 깊이 깎여 움푹 파인 곳도 있고, 겉껍질이 채 벗겨지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냄비에 밤이 잠길 만큼 물을 붓고 베이킹파우더가 잘 녹을 수 있도록 슬슬 저어주었다. 물을 올려 밤이 자작하게 잠길 만큼 담가 뒀다. 반나절 정도는 불려야 한다기에 그대로 담가 둔 채 퇴근했다. 다음날, 냄비를 불에 올린 다음 삼십 분 정도 밤을 삶았다.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모양이 예쁘게 잡히질 않아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어? 왜 이러지?” 밤은 내 기대와 달리 힘없이 쩍쩍 갈라지고 부서지는 게 아닌가. 예상 밖의 결과에 부푼 마음이 폭삭 꺼졌다. 속껍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깨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수어 번 반복되는 시도에도 자꾸 밤이 깨지자 답답한 마음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문득 툇마루에 앉아 딱딱한 밤을 조심스레 손질하던 이치코의 모습이 떠올랐다.
시장에서 밤 두 망을 더 사 왔다. 밤껍질이 어찌나 딱딱한지 칼 날이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 불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밤껍질을 까다 보니 손바닥에 진땀이 났다. 나중에 시장 판매자에게 물어보니 뜨거운 물에 십 분 정도 담근 후 손질하면 껍질이 부드러워져 잘 벗겨진다고 했다. 후에 밤 조림을 만들 땐 그 방법을 이용했는데 정말 겉껍질이 결을 따라 쭉 찢어져 한결 수월하게 벗겨낼 수 있었다. 부슬부슬한 속껍질만 남은 밤을 베이킹파우더를 풀어둔 물에 하룻밤 담가 두었다.
다음 날, 괜한 기대에 실망할까 싶어 마음을 비우고 신중을 기했다. 물을 다시 불에 올려 밤을 삶았다. 깔끔하게 밤이 삶아지는 걸 보자 나도 모르게 외치게 된다. “밤이 살아 있어!” 밤의 속살을 단단히 부여잡아주는 것이 밤의 속껍질이라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첫 물은 속껍질에서 우러나온 부유물 때문에 까맣고 탁하다. 채 반에 깨지지 않게 밤을 부어 첫 물을 버려냈다. 불은 밤 속껍질을 엄지로 살살 문질러주니 종이 밀리듯 밀려난다. 중간중간 끼어 있는 굵은 심은 이쑤시개로 정리해주었다. 어느 정도 밤 속 껍질 정리가 다 된 것을 확인하고 두 번째 물을 준비했다. 냄비에 밤을 옮겨 담고 새 물을 채워주면 된다. 약한 불로 삼십 분 정도 삶아주고 다시 채반 행. 한 번 더 속껍질을 손으로 밀어 벗겨낸다. 이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하고 나면 처음과 달리 자줏빛이 도는 맑은 국물을 볼 수 있다. 이전에 밤 살이 으깨져 냄비 속이 뿌예진 것과는 달랐다. 이번엔 마음에 드는 밤 조림이 진짜 완성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자꾸 웃음이 샜다. 그래도 또 망할까 싶어 스스로 다짐해둔다. 아니야, 괜히 기대하지 말자. 완성이 되어야 완성인 거지.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 손질을 시작했다. 딱히 깎인 데 없이 속 살을 그대로 드러낸 밤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아까워 어떻게 먹을까 싶어 미리부터 애가 녹았다. 드디어 하이라이트! 밤을 조릴 참이다. 밤이 자박하게 잠길 만큼 물을 채우고, 밤 무게의 반 정도 되는 설탕을 넣어 약한 불에서 뭉근히 익도록 조 리기 시작했다. 설탕이 녹으며 밤 삶는 단내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 마음이 안달 나 혼났다. 고지에 다다랐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국물이 반으로 졸아들 때쯤 브랜디 한 큰 술, 간장 한 큰 술을 넣고 휘 둘러 저어준 다음 불을 껐다. 요리의 즐거움은 완성 직후에 있지 않을까. 밤 한 알을 꺼내 접 시에 올린 다음 반으로 쪼갰다. 겉이 진한 고동색이라면 속살은 여전히 노란빛을 지키고 있다. 쪼갠 밤을 호호 불어 입안에 넣었다. “뭐야! 너무 맛있잖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부드럽고 짭조름하기도 하고 달콤했다. 먹고 있자니 행복이 밀려온다. 그 간의 고생이 의미를 찾는 순간이었다.
잘 소독된 병에 밤이 부서지지 않게 넣고 시럽을 병목까지 채워 뚜껑을 꽉 닫았다. 드디어 진짜 완성이다. 끝! 농사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던 이치코의 말처럼 밤 조림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밤의 크기나 수분에 따라 삶는 시간을 조절하고, 속껍질 손질하는 횟수를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밤들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버려진 덕에 알게 된 것이 다. 실패가 많았지만 그 덕에 이젠 능숙하게 밤을 조릴 수 있게 됐다. 타이밍을 알 수 있는 건 눈치나 운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체득하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검지가 얼마나 더 칼등을 이겨낼지 알 수 없지만 딱 이겨내는 만큼 올겨울을 위해 밤 조림을 넉넉히 만들어 두어야겠다. 지금이 가을을 봉인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니까.
겨울이 전하는 말
밤 조림은 오래 냉장 보관하면 밤 조직이 단단해진다. 오래 보관할 경우에는 빛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깨진 밤 이 아까워 병에 담을 때 함께 넣으 면 시럽이 탁해지고 훨씬 빨리 변질된다. 병입 할 때는 온전한 것으로만 골라 담자.
달착지근한 밤 조림
대형 마트나 농산물 가게, 청과상에 가면 명절 즈음에는 겉껍질만 벗긴 밤을 팔기도 한다. 직접 조려 만들고 싶지만 밤 까는 일이 조금 귀찮다면 기성 제품을 이용해도 좋다.
재료 햇밤 1kg, 설탕 500g, 브랜디 1 큰술, 간장 1큰술
조리순서 ❶ 베이킹파우더를 푼 물에 햇밤을 하룻밤 불렸다가 속껍질만 남기면서 벗긴다. ❷ 밤을 한 번 삶 아준 다음, 밤 사이에 남은 두꺼운 심은 이쑤시개로 콕콕 찔러가며 제 거해준다. ❸ 자작하게 밤이 잠기게 물을 부어 끓이고, 한소끔 끓어오르면 설탕을 밤 무게의 반 정도 넣어 저어준다. ❹ 국물이 반 정도 남았을 때 불을 끄고 식힌 다음, 소 독한 병에 넣어 보관한다. ❺ 일주 일 정도 지나면 시럽이 잘 배어들 어 맛있게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