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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12. 2022

거 퇴고 좀 작작 하지

나를 레벨업하는 페르소나 SNS 글쓰기 (9)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부치지 말란 말이 있죠. 새벽 감성에 젖어서 쓴 글을 아침에 정신 차리고 나서 보면 낯뜨거워서 못본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요 밤은 우리를 취하게 해요. 술을 안 마셔도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대낮엔 안 쓰던 표현을 쓰게 되죠. 거기엔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어요. 종일 수고한 후에 몸도 마음도 노곤해져서 자기를 검열할 힘이 바닥을 친 거죠. 그러니까 머리와 마음이 필터링 없이 생각과 감정을 마구 뿜어내는 거예요.


근데 제 생각은 그래요. 그렇게 새벽 감성에 취해서 여과 없이 쓴 글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글이 아닐까? 이성과 객관이란 잣대로 생각이 문장으로 다 나오기도 전에 여기저기 썰어버린 글보다는 여과기의 틈이 듬성듬성해져서 내 안에 있던 것이 마구 쏟아져버린 글이 더 나를 잘 보여주는 글 아닐까? 안 그래요?


저는 그래서 주로 밤에 글을 써요. 지금 이 글도 애 재우고 밤 9시 55분에 초고를 쓰고 있어요. 졸라 피곤해. 진짜. 어휴 애 낳기 전에는 아내한테 셋은 낳자고 했거든요. 근데 미친 소리였어. 키워보니까 안 되겠어. 셋은 무슨. 둘이 한계야. 더는 안 돼. 나이 마흔 넘어서 다섯 살, 한 살 형제 키우려니까 몸이 버텨내질 못해. 맨날 기진맥진이야.


그렇게 피곤하니까 글을 그냥 막 쓰고 있어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제가 이렇게 피곤에 절어서 막 쓴 글을 많은 사람이 재미있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책 리뷰를 올리는데요 이렇게 밤에 그냥 마구잡이로 쓰거든요. 근데 반응이 좋아. 내 글이 좋다는 사람들 꽤 있어요.


왜냐? 재미있거든. 개성 있거든. 나만의 생각, 나만의 표현이 날것처럼 담겨 있거든.




난 솔직히 사람들이 자기 글을 남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게 유감이에요. 다들 전문 작가가 쓴 글을 좋은 글의 기준으로 삼아요. 고상하고 정제된 글이 진짜 잘 쓴 글이라고들 생각하죠. 감정을 너무 격하게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표현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그런 글을 흉내 내요. 근데 그러면 그냥 흉내 낸 글 밖에 안 돼요.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글빨로는 그 사람들 못 따라가요. 아니 밥 먹고 글만 쓰는 사람들을 어떻게 쫓아갈 거야? 애초에 글쓰기에 투입하는 시간 자체가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글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무엇이냐? 뭐긴 작가의 생각과 개성이 잘 드러나는 글이지. 뻔한 말이죠? 근데 이렇게 뻔한 게 잘 안 지켜져. 왜냐? 말했다시피 다들 전문 작가의 글을 이상향으로 두고 흉내 내려 하거든.


그러지 마. 그 사람들에겐 그 사람들의 길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길이 있는 거야. 특히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따라하려고 하면 진짜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다 찢어져요. 글쓰기의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포기하게 돼요.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써도 그 기준엔 미달이거든. 말했잖아요 밥 먹고 글만 쓰는 사람들을 어떻게 따라갈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저는 퇴고를 대충 할 것을 권합니다. 멋지게 정제된 글을 쓰겠다고 퇴고를 너무 열심히 하면 글이 밋밋해져요. 초고에 묻어 있던 개성이 다 썰려 나가요. 모두가 미끈한 보석을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다 똑같아 보여. 재미가 없어. 오히려 좀 모나고 투박한 게 눈에 띄지.




그럼 퇴고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일단 다시 쓰지 마. 퇴고하라고 하면 초고를 한 번 읽고 처음부터 싹 다시 쓰는 애들 꼭 있다. 응 나야.


예전엔 초고의 내용을 머리속에 담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다시 썼어요. 엄청 심혈을 기울여서. 초고 쓸 때보다 시간이 더 들지. 그래서 퇴고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물론 완성하고 나서 보면 뿌듯하죠. 근데 문제는 완성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중도에 포기할 때가 많단 거예요. 기껏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글을 썼는데 아무한테도 못 보여 주고 휴지통행이 되는 거예요. 혹은 아예 글쓰기를 미루거나요.


그러지 마. 어차피 지금 책에 실을 글을 쓰자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SNS에 올릴 글인데 뭘 그렇게 진을 빼. 우리가 지금 하는 글쓰기의 취지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페르소나를 글 속에서 구현해서 그 페르소나가 내 삶의 더 넓은 영역에 배어들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글을 많이 쓸수록 효과가 더 좋겠죠? 자꾸만 페르소나를 글로 실현해봐야 더 좋겠죠? 그러니까 퇴고에 너무 긴 시간을 들이지 마세요.


그러면 글이 엉망이 될 텐데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냐고요? 괜찮아. 말했잖아요. 남들은 그렇게 글 꼼꼼하게 안 봐요. 생각해보세요. SNS에서 남의 글 볼 때 막 문장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봐요?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봐요? 아닐걸? 그냥 슥슥 스크롤하면서 대충 읽을걸?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써도 돼요. 책 쓰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구체적으로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게 좋으냐? 간단해요. 일단 초고를 쓸 때처럼 나를 레벨업하는 페르소나 SNS 글쓰기의 취지에 맞게 내가 정한 페르소나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30초~1분 정도 떠올려봅니다. 그다음으로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한 번 쓱 읽어요. 그러면 어딘가 삐그덕거리는 부분이 보일 거예요. 글이 삐그덕거리는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있어야 할 내용이 빠졌다. 둘째, 전혀 쓸데없는 내용이 붙었다. 셋째, 내가 썼지만 뭔 말인지 모르겠다. 넷째, 앞뒤 연결이 이상하다.


그럼 됐어. 이제 첫 문장부터 다시 읽으면서 그 삐그덕거리는 부분을 수정하면 됩니다. 빠진 내용 있으면 다시 넣고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은 내용은 빼. 그리고 뭔 말인지 모르겠으면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세요. 아마 초고 쓰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이상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기억날 거예요.


그리고 앞문장과 뒷문장의 흐름이 이상하다? 그래서 내가 말했죠? 앞문장에 나온 표현으로 뒷문장 시작하라고. 그러면 한번 앞문장에 나온 표현을 이용해서 뒷문장을 바꿔보세요. 그래도 안 돼? 그러면 혹시 그 사이에 빠진 내용이 없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래도 안 돼? 그럼 그냥 놔둬요. 뭐 어떡해. 그게 지금 한계인데. 계속 글 쓰면서 실력을 키워야지. 한 문장 붙들고 시간을 너무 오래 끌면 진 빠져서 글을 통째로 포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 쓸 때 더 흐름을 신경 쓰기로 하고 대충 넘어가요.


그밖에 표현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바꿀 수 있으면 바꾸세요. 그냥 적당히. 너무 꼼꼼히 보지 말고.


그러면 대충 완성됐어.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입으로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그러면 표현이나 흐름이 어색한 부분이 더 잘 잡혀요. 그런 부분 역시 적당히 수정하세요.


자 그럼 끝. 이 정도만 하고 그냥 올려요. 완벽하지 않은데 괜찮냐고요? 네. 어차피 완벽하게 못 해요. 우리는 그냥 60점만 하면 되는 거야.


당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글을 100점이라고 했을 때 반타작만 하면 된다는 거죠. 어차피 100점은 못 맞아. 날고 기는 작가들도 자기 글 보면 못 쓴 것 같다고 말하는데 뭘. 100점은 그냥 불가능한 거고 8-90점도 글쎄요 출간하거나 어디 중요한 곳에 제출할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면 굳이 그 정도 점수를 목표로 해서 힘 뺄 필요없다고 봐요.


그럼 60점의 기준은 무엇이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느냐, 예요. 그러면 된 거야. 남이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된 거야.


그러니까 중요한 건 흐름이에요. 문장과 문장 사이의 흐름은 좀 부자연스러울 수 있어. 하지만 글 전체를 읽었을 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대략적으로라도 읽히면 됐어요.




이렇게 대충 적어버릇하면 글이 늘겠냐고요? 네 늘어요.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 소개된 실험이 있어요. 한 학기 동안 수강생을 반으로 나눠서 A그룹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공들여 찍게 하고 B그룹은 무조건 많이 찍게 했대요. 그랬더니 B그룹의 실력이 더 많이 향상됐어요. 많이 부딪힐수록 많이 배우고 많이 발전한단 거죠.


그건 사진이고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건 글 아니냐고? 하지만 둘 다 감각에 의존하는 건 같아요. 사진 찍는다고 구도니 빛이니 아무리 머리로 공부해도 결국 실전에서는 몸에 밴 무의식적 감각이 품질을 좌우하거든요. 글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작법 원리를 공부해도 글빨은 기본적으로 감각이에요. 센스. 그러면 센스를 어떻게 기르느냐? 꾸준히 쓰고 많이 써야지. 그게 최선이에요.


근데 글을 꾸준히 쓰려면 재미를 느껴야 해요. 하지만 퇴고에 너무 힘을 빼면 글 쓰는 게 두려워져. 힘들거든. 그래서 글 쓰는 게 재미없어져요. 그러니까 대충 쓰세요. 나도 처음 브런치 개설하고는 글을 한 달에 한 편 쓰면 많이 쓰는 거였어요. 그러다 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기가 있는데 무조건 하루 한 편 쓰기를 했을 때예요.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난 70점만 하는 글을 쓰겠다고 공언했어요. 그러고서 몇 년 간 못 찾았던 글 쓰는 재미를 되찾았어요. 너무 공들이지 않고 쓰니까 글이 훨씬 빨리 완성되고 그만큼 소소한 성취감을 자주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써요. 요즘은 주로 인스타그램에 쓰는데 말했듯이 그냥 60점만 하자고 생각하고 써요. 심지어 이 브런치북에 쓴 글도 다 그런 마음으로 썼어요. 전부 이 글에서 말한 만큼만 퇴고했고요. 그래야 공평하지.


그러니까 당신도 대충 퇴고해. 그럼 글 쓰는 게 재미있어지고, 그럼 더 많이 쓰게 되고, 그럼 자연스럽게 글빨이 늘어. 날 믿어. 내가 다 해보고 하는 소리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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