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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Oct 12. 2022

글에도 후숙이 필요하다

나를 레벨업하는 페르소나 SNS 글쓰기 (10)

퇴고 대충 하라고 하면 찜찜한 애들 꼭 있다. 글이 영 성에 안 차는 거지. 어디 내보이기 부끄럽고. 그 마음 이해해요. 나도 그럴 때 있거든. 특히 나처럼 실명 까고 글 올릴 때는 그런 불안감이 더 심해져요. 읽는 사람이 ‘명색이 번역가란 인간이 글이 뭐 이 모양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필명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퇴고를 대충 해도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 있어요. 간단해요.


글감을 숙성하세요.


어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일단 메모를 해놔. 그리고 한 일주일쯤 후에 글을 쓰는 거야. 그 사이에 구태여 어떻게 쓸지 생각 안 해도 돼요. 뇌가 알아서 생각할 거거든. 이 뇌라는 애는 좀 쉬라고 놔두면 기어이 생각할 거리를 찾아요.


한번 해보세요. 글감을 메모만 해놔봐. 그러면 막 샤워할 때, 텔레비전 볼 때, 설거지 할 때, 용변볼 때, 운전할 때처럼 멍하게 있을 때 뇌가 그 글감에 대해 생각한다니까? 예를 들면 ‘첫 문장을 이렇게 쓰자’, ‘이런 흐름으로 진행해보자’, ‘이런 예시를 써볼까’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온갖 아이디어를 떠올려요. 그리고 또 뭔가를 보거나 읽거나 들을 때 문득 ‘아 이거 써먹어야지!’ 하고 머릿속 전구에 불이 번쩍 들어오기도 하고요.


난 달리기를 할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달리면서 팟캐스트를 듣는데요, 그러면 사람이 좀 멍해져요. 뇌를 빠릿빠릿하게 돌릴 필요 없이 그냥 귀에 들리는 걸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근데 또 누군가가 귀에 대고 계속 떠드니까 그게 자극이 돼서 문득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그래서 그 생각을 발전시키다 보면 팟캐스트 내용을 못 들어서 다시 앞으로 돌릴 때 많아요.


여담이지만 달리기는 생각하기 좋은 운동이야. 단조롭거든. 그래서 소설가 김연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달리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두 사람 다 내가 이십 대 때 탐독했던 작가고 그들의 작법론을 담은 에세이는 특히 명저예요. 어쩌면 내가 달리기를 하는 것도 두 사람의 영향인지 몰라요. 대작가들이 달리기를 한다니까 나도 따라해보자, 그러면 뭐라도 되겠지!




여하튼 그렇게 글감을 숙성해보세요. 내가 얼마 전에 브런치에 <나는 어떻게 5000원짜리 번역가가 됐는가>라는 글을 썼어요. 내가 번역료를 장당 5000원(200자 원고지 기준) 받는다고 자랑하면서 그 경지에 오르게 된 비결을 설명하는 글이에요. 참고로 출판번역계에서 장당 5000원이면 꽤 많이 받는 겁니다. 그만큼 내가 잘나간단 거지. 일감도 1년 치는 기본으로 밀려 있고. 응? 뭐가? 왜? 아니 내 글인데 이 정도 자랑은 괜찮잖앜?


그 글을 쓸 때도 바로 안 쓰고 폰에다 일단 ‘5000원 번역가’라고 메모한 후에 일주일쯤 묵혀뒀지. 솔직히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어. 긴 글 쓰는 거 귀찮아서 잘 묵혀두거든요.


그랬더니 일상에서 문득문득 그 글을 어떻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처음에는 ‘인맥이 은근히 중요하다, 계속 자기 글 쓰면서 실력을 쌓고 SNS 통해서 퍼스널 브랜딩해라’라고만 쓸 예정이었거든? 그러던 중에 <오늘의 웹툰>이란 드라마를 봤어요. 너무 열정 타령하는 게 거슬리지만 웹툰 피디와 작가들의 삶을 재미있게 그린 작품이에요. 그 드라마를 보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 있을 수 없다.”


나도 좋아하는 피칠갑 판타지 액션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명대사를 인용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5000원 번역가 글에 써먹야겠다!’ 하는 생각이 머리에 팍 꽂힌 거야. 내가 번역에 대한 책도 내고 브런치에 번역에 대한 글을 종종 쓰니까 지망생들의 문의를 적잖이 받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이 지금 직장 다니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말해요. 번역이 일종의 도피처인 거지. 근데 나한텐 번역이 도피처가 아니야. 나한테 번역은 인생의 낙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잘나갈 수밖에 없지. 왜 그럼 말 있잖아.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그게 내 얘기거든. 말했지 내 글이니까 내 자랑한다고.


하여튼 드라마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서 얼마 후에 그 아이디어 대로 글을 썼더니 확실히 처음에 생각했던 내용보다 완성도가 높아졌어요. 원래는 실용적 차원의 글이었는데 저 대사에 얽힌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철학적 차원이 가미된 거지.


난 이런 경우 많아요. 뭘 써야겠다고 메모를 하든, 아니면 기억만 해놓든 간에 일단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문득문득 그 글에 대한 생각이 나면서 줄기가 생기고 살이 붙어요. 그래서 글을 쓰면 술술 써져요. 최근에 쓰는 글은 대부분 그런 프로세스로 써요.




이렇게 하면 퇴고에 너무 공을 안 들여도 돼. 왜냐하면 이미 머릿속에서 체계가 잡히고 다듬어진 생각뭉치를 글로 옮긴 거니까. 물론 아무리 글감을 숙성했다고 해도 머릿속에 있는 무형의 생각을 글로 풀어냈을 때 항상 만족스러운 글이 나오진 않아요. 하지만 아무 아이디어도 없이 쓸 때보다는 나은 글이 나오지.


그러니까 가능하다면 글감을 메모해놓고 며칠쯤 묵혀 두세요. 어차피 맨날 폰 들고다니잖아. 거기다 메모만 하세요.


아 그리고 글을 쓰기 전에만 아니라 퇴고하기 전에 글을 숙성하는 것도 좋습니다. 초고 쓰고서 또 일주일쯤 묵혀두는 거지. 그러면 그 사이에 글을 보완하거나 수정할 방법이 생각나요. 말했잖아, 우리 뇌는 계속 생각한다고. 그러면 또 그 아이디어를 초고 끝부분에 기록해놔요 안 잊어버리게. 그러고서 퇴고할 때 참고하는 거지. 그러면 즉흥적으로 원고를 수정한 게 아니라 이미 생각해둔 계획에 따라 수정하게 되니까 마음이 좀 놓일 거예요.


그렇다고 글감이나 초고를 또 막 한 달, 두 달 이렇게 너무 숙성하면 안 돼. 그렇게 간격이 길어지면 글을 쓰고 싶은, 혹은 수정하고 싶은 욕구가 흐물흐물해져버리거든. 그러면 아까운 글 날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숙성은 한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그 정도면 딱 알맞게 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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