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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의주도 미세스 신 Jul 05. 2021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일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기를 지켜보는 재미만큼

삼십여 년 동안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알고 보니 나는 대식가였다.

그동안 나는 뱃골이 작아 많이 먹지 못하고, 조금만 과식하면 잘 체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루에 세끼를 먹어본 적이 거의 없고, 적은 양을 천천히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저녁 7시 이후에 뭔가를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편이었다.

딱히 어떤 음식이 먹고 싶었던 적도 없고, 특별하게 좋아하는 음식이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보니

큰 대접에 가득 찬 밥과 국을 우적우적 순식간에 해치우면서도

배탈 한번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 끼라도 소홀히 먹으면 젖이 잘 나오지 않거나 젖에 영양분이 부족할까 봐

틈틈이 부엌에서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먹깨비였다.

그동안은 정말 몰랐다.


알고 보니 나는 집순이였다.

그동안 나는 금요일이면 친구들과 여기저기 핫플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주말이면 남편과 산으로 바다로 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또 한 달에 한두 번쯤은 마음 맞는 동료들과 모여 악기를 들고 모여 합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흥이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보니

나는 몇 달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육퇴 후에는 철 지난 드라마를 되돌려 보며 흐뭇해하고,

불금에는 맥주 대신 탄산수를 마시며 한 주를 돌아보고,

주말에는 다른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훔쳐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초능력자였다.

그동안 나는 몸으로 하는 것이 어색한 사람이었다.

체육 시간에는 늘 배제되었고,

조금만 무리해도 며칠은 골골대는 개복치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보니

아주 먼 곳에서도 잠자는 아기의 뒤척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두 팔로 아기를 안은 채로 기저귀를 꺼내거나 문을 여닫는 것은 물론이며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조작하여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끄고 켤 수 있다.

백 일도 안된 아기랑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몇 달간 잠을 제대로 잔 날이 없으면서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는 강철 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나는 탈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동안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철마다 예쁜 옷, 신발 하나쯤은 새로 사고 싶었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기발한 생각으로 기가 막히게 좋은 논문도 쓰고 싶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고, 책도 많이 읽어서 잘난 척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 보니

그동안의 욕심 따위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저 아기가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똥을 잘 싸면 된다.

아기 울음의 의미를 몇 초라도 빨리 알아차려 불편함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고,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아기 사진을 올리며 헤벌쭉 웃는 아들바보였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는 아이를 갖는 게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 모든 신경은 아기에게 향해 있을 것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의 아기와 즐겁게 살아가야겠다.


너처럼 예쁜 문신을 얼굴에 새길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에필로그>

대식가인 나에게 남편이 이야기했다.

"엄마가 밥을 많이 안먹어서 아기가 날씬한거 아니야?"

휴- 대식가의 길은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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