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
찬바람이 내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사 년 전만 해도 봄날 밤이면 골목에는 라일락 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었고, 자목련 앞에 핀 백목련의 흰 빛이 눈 부셨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오직 한 그루의 감나무만 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사람들이 나와 감나무를 쳐다보며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이백 년도 더 된 것 같은데 꼭 베어야 할까요?”
“감나무는 열매를 맺잖아요. 천 개가 훨씬 넘을 것 같은데요? 경로당과 어린이집 간식을 대고도 남아요.”
여름이 오기 전부터 시작된 실랑이였다.
마당이 있는 집들이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섰을 때 나와 감나무는 아파트 뒤편 담장 밖으로 밀려났다. 올해 초에 새 도로가 나자, 입주자들은 후문을 내기로 했다. 후문이 들어설 자리에 감나무와 내가 있었다. 감나무가 없어지든 내가 없어지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나는 이백 년이 넘도록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내 몸을 타고 오르며 놀던 개구쟁이들과 돈 벌러 갔다가 아이들 손을 잡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내가 만든 그늘에 앉아서 한담을 나누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 시절 감나무는 집집이 있었고, 모과나무와 향나무와 소나무도 있어서 박새, 까치, 곤줄박이, 참새들이 놀다 가곤 했다.
내 옆에 서 있는 저 감나무와 함께 한 지는 백 년쯤 되었다. 키가 크고 셀 수 없이 많은 잎을 단 나는 가을이면 눈부신 황금빛 옷을 입었다. 내가 떨군 잎들은 길 위에서도 아름다운 황금빛을 잃지 않았다. 소녀들과 아이들이 노랗게 물든 길을 특히 좋아했다. 나는 계속 이 자리에 있고 싶다.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싶고 콧노래를 부르며 떨어진 잎을 줍는 소녀들을 보고 싶다.
“고약한 냄새가 정말 싫어요. 반드시 은행나무를 베야 해요.”
“문을 조금 옆으로 옮겨서 내면 안 될까요?”
“구청에서 겨우 허가받았는데 번복할 수는 없어요.”
감나무는 올해 유난히 많은 열매를 맺었다. 금방이라도 가지가 부러질 듯 위태롭기까지 하다. 연한 노란 빛 감들이 숨바꼭질하듯 초록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감이 주홍으로 물들어 가는 속도만큼 저녁 해가 짧아졌다. 감나무 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저녁, 마침내 잎들이 다 떨어졌다. 오롯이 맨몸을 드러낸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감들의 색깔이 저녁노을보다 짙었다. 고개를 돌리면 주황색 감이 있고, 고개를 들면 주황빛 노을이 있다. 유독 눈부신 노랑 잎을 만든 나는 가능하면 천천히 잎을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은행나무가 없어지면 너무 슬플 거야.”
“나도 그래, 감은 사서 먹으면 되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첫눈이 내렸다. 올해엔 아무도 감을 따지 않았다. 감들이 소복하게 눈을 이고 있다. 작은 새들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을 때마다 눈가루가 우수수 흩어졌다. 나무에 매달린 채 얼어가는 감들은 눈에 띄게 부피가 줄었다. 쌓인 눈이 녹자마자 또다시 눈이 내렸다. 감들은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있다. 쪼그라든 감들이 낙엽 색을 닮아갔다. 거무죽죽하게 얼룩지고 쪼글쪼글해져서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는 감들이 가여웠다. 바싹 마른 낙엽이 바람에 흩날렸다. 잿빛 하늘이 황량한 풍경에 쓸쓸함을 보탰다. 어둠이 감나무와 나를 싸 안았다. 낙엽들마저 어둠 속에 갇혔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감나무는 인사하듯 고개를 숙였고, 감이 하나씩 떨어졌다.
뚜벅뚜벅. 나는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내 다리에 갖다 댔다. 이이잉 소리와 함께 뾰족한 무엇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느낌 뒤에 뒤이어 불타는 듯한 고통이 휘몰아쳤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다.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은 잦아들었으나 몸 안의 물기가 점점 사라졌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감나무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감나무보다 백 년이나 더 살았으니 내가 먼저 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또다시 밤이 왔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남자보다 덩치가 작았다.
“누가 은행나무 밑동에 구멍을 뚫고 농약을 넣었나 봐요.”
“감나무 밑동에도 구멍이 뚫려 있는데요?”
“한 그루만 베면 되는데, 이제는 둘 다 베어내야겠군요.”
며칠 뒤 큰 차가 세 대나 왔다. 기중기가 밧줄로 내 몸을 묶더니 굴착기가 내 주위의 땅을 팠다. 나와 감나무는 기중기에 들려서 트럭에 실렸다. 우리는 난생처음 얼굴을 맞대고 누웠다. 감나무도 나도 울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나무의 뺨을 어루만졌다. 감나무도 앙상한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굳게 포옹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워서 보는 하늘이 티 없이 맑고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