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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Apr 12. 2021

첼로 전공자와 아마추어 첼리스트

나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들 #2 |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경계에서

사랑이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은 아닌지

냉정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엔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고

열정으로 다가가는 순간에도

냉정이란 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 냉정과 열정사이 中 -

(마지막 부분에 링크해 둔 YouTube 채널에서 발췌)


과거에는 전공자였고,
지금은 비전공자인
나는 경계의 부유자.



첼로를 시작한 건 6살 때쯤.

전공을 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마도 '직업'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 나이 그 언저리쯤.

아니, 마음을 먹었다기보다 그냥 그렇게 첼리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시기라고 해야 할 듯하다.

아빠처럼 첼로를 전공하고, 언젠가 오스트리아나 독일로 유학을 가고, 돌아와서 K나 S, 혹은 B로 시작하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연주와 레슨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나의 것이 될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간 시간이 참 길었었다.

고3 입시 때 원하던 대학에 줄줄이 낙방한 후 쫓기듯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도, 다니게 된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마 언젠가는 당연히 흘러가듯 유학길에 올랐을 것이었다.


무대에서 손을 다친 후 꽤 오랜 시간 방황을 했다.

하기 싫던 첼로를 더 이상 잡지 않아도 되는 것은 행복했지만, 십여 년간 첼로 밖에는 한 것이 없는 나로서는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 이민 2세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선택한 다음 전공. 그 전공이 너무나 하고 싶었었다기보다는 2세 아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새롭게 가게 된 학교에서는 내가 첼로 전공을 했었다는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고, 흥미로워했다.

사실 지금도 어딜 가나 내 학부 전공이 첼로였다는 것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좋아하고 신기해한다.

첼로 소리 너무 좋아해요, 라는 말과 함께.

그러고 보니 과거에 첼로 전공자였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도 내가 첼로를 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열어주는 분들을 만나기도 한다.


음대를 완전히 나온 뒤에도 첼로를 자주 잡지는 않았으나 아예 몇 년 동안 놓는 일은 없었다.

아주 조금씩 한 곡 정도의 축주를 할 기회들이 생겼고, 누군가의 음반에서 첼로 라인 연주자로 녹음할 일들이 생겼다. 그 덕분에 왼손이 완전히 굳는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클래식 악보는 펼 수도, 연주를 할 수도 없었다.

왠지 악보를 펴면 전공하던 시절의 아픔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고, 레슨 받던 시간의 눈초리가 다시 나를 내려다볼 것만 같았다.


여기 이 부분은 그 파#이 아니잖아!


파# 음 하나로 한 시간 레슨 시간을 꽉 채우셨던 우리 교수님은 왼손 약지에 늘 큰 반지를 끼고 계셨다.

결혼 반지인 줄 알았는데, 커다란 낮은음자리표가 그려져 있기에 여쭤보니 자신은 음악이랑 결혼을 하셨다고 했다.

음악이랑 결혼을 하면 파#을 너무 사랑해서 그 노래에 딱 맞는 파# 음색을  내지 못하면  학생의 혼을 그렇게 쏙 빼도 되는 건가, 생각했다.


음악이랑 결혼하셨다던 그 교수님은 정말 연습 벌레셨다.

학생들 레슨 하는 시간 중간중간에도 늘 연습을 하고 있었던 분. 너무 많은 연습으로 왼손가락 끝마디는 하나하나가 다 개구리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저 정도 연습을 해야만 첼리스트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더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첼로를 그만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손을 다쳐 첼로를 안 하게 되었다고 시원섭섭하게 좋아했는데...

새롭게 들어간 학교에서도 결국엔 밴드에 들어가 연주를 하게 되었다.

물론 손이 아파 오래 악기를 잡을 수 없었고, 친구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저 아주 조금씩 연주하는 방법을 잊지 않을 정도로 함께 할 수 있었다.

첼로를 하는 게 무조건 괴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재밌게도 전공을 완전히 포기하고 들어간 새 학교에서 알게 되었다.


레슨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누군가 나의 연주를 보고 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 생경했다.

그리고 나의 첼로 실력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음을 연주해도 박수를 쳐주고 행복해하고 기뻐한다는 것은 너무 독특한 경험이었다.

무대에 서서 박수를 받기 위해 연주를 하고, 앙코르를 위해 박수가 끊이지 않는 연주를 하려 애썼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전공을 하지 않고 힘을 뺀 채 연주를 하니 오히려 박수를 받는 희한한 경험.


첼로를 다시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던 건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에서 한 사람이 홀로 노천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아오이와 쥰세이가 바라보는 장면을 새로운 시각에서 만났을 때였다.

전공할 때엔 그저 넘겨버렸던 그 장면.


그 장면을 보고 싶어서, 상상하고 싶어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떠올려보고 싶어서 그 영화를, 그 책을 보고 또 보았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경계에서,

그렇게 나는 부유하게 되었다.



경계를 부유한다는 것,

경계선에조차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은 불안하고, 아웃사이더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에 이쪽에 서면 저쪽이 그립고 저쪽에 서면 이쪽이 그립다.

어쩌면 늘 그리운 삶이 경계인의 삶이 아닐까.


그립다는 것은 그만큼의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

이쪽과 저쪽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괜찮은 삶인지 모르겠다.

조금은 불안하고, 조금은 외롭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첼로를 사랑했던 것 같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https://youtu.be/cyYHJXd8jUc


나와 첼로에 얽힌 이야기들..


https://brunch.co.kr/@gnade1018/13

https://brunch.co.kr/@gnade10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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