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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nugeun Jan 20. 2020

차 본 시계 - 파네라이 PAM510

이탈리아 해군을 위해 탄생한 브랜드, PANERAI의 입문형 모델

예전에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롤파 조합'이란 게 유행했다. 롤파 조합이란 롤렉스 + 파네라이의 조합으로 시계 컬렉션을 구성한다는 의미인데, 인지도 면에서 시계 브랜드의 정점에 서있는 롤렉스와 대등하게 짝을 이룰 정도로 자기만의 히스토리와 마니아층을 확보한 브랜드가 바로 파네라이란 걸 방증하는 유행이었다(가격도 대등...).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때 찍은 사진

파네라이 마니아들은 그 어떤 시계 브랜드의 팬보다 활발하게 커뮤니티 활동을 한다. 그 결과 그들을 지칭하는 파네리스티(Paneristi)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파네리스티를 꼽자면, 파네라이가 현재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탤론을 들 수 있다.


평생에 걸친 운동으로 다져진 굵은 손목에 꽉 차는 걸 보니 굉장히 큰 모델인 것 같다.

실베스타 스탤론과 파네라이의 이야기는 꽤 흥미롭다. 관심 있다면 나무위키 Officine Parerai를 읽어보기 바란다. 검색하다 보면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제이슨 스타뎀, 드웨인 존슨이 차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구입 계기

파네라이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의 시계는 크기가 크다. 인기를 끄는 주력 모델은 대부분 케이스 직경이 44mm를 넘어가고, 47mm에 달하는 시계도 잘 팔려 나간다.


그런데 시계 커뮤니티에선 보통 케이스 직경이 43mm만 넘어가도 좀 크다는 평이 나온다. 나 역시 너무 큰 시계는 손목에 찼을 때 사람이 안 보이고 시계만 보이는 것 같은 과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42mm 이하의 시계를 선호했다. 그래서 처음 이 브랜드를 접했을 땐 대충 디자인한 것 같은 단순한 다이얼에 부담스럽게 크고 비싼 시계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파네라이의 입문용 모델에는 브랜드에서 직접 개발한 무브먼트가 아니라 범용 무브먼트가 탑재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다른 여러 시계 브랜드에서도 함께 사용하는 무브먼트를 사다가 조금 손봐서 안에 넣고 훨씬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다. 시계는 조금만 인기를 끌어도 가짜가 판을 치게 마련인데, 단순한 디자인 + 범용 무브먼트의 조합은 가짜(fake)를 만들어 내는 게 아주 쉬워서 덕분에 가짜 파네라이도 판을 치게 되었다. 당시 가짜가 얼마나 많았는지 fake + panerai를 합쳐서 파케라이라는 말까지 함께 유행했다. 물론 사치품의 영역에서 가짜는 절대 진짜의 가치를 따라올 수 없다. 겉모습은 물론 그 기능과 성능까지 완전히 똑같이 만든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가짜가 너무 많이 유통되면 가짜는 물론 진짜도 사고 싶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러니 내가 매력을 느낄 리 만무했는데, 분명 그래서 참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어느 순간 이 단순하고 투박한 시계가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시계 커뮤니티에서 파네라이 게시판에 들어가 파네리스티들이 올려놓은 사진을 감상하게 되었고, 파네라이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모델을 검색해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 브랜드가 가진 히스토리를 알게 되었고, 이 투박한 디자인의 시계가 생각보다 여러 복장에 잘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가죽 스트랩을 채우면 비즈니스 캐주얼 복장에도 잘 매칭된다
트레이닝 복장에도 잘 어울린다
브랜드 명을 새겨 넣은 러버 스트랩

결국 난 이 브랜드와 시계에 반해 버렸다. 그 이후는 늘 그렇듯 비슷하게 흘러갔다. 매장에서 신품을 제 돈 주고 사기엔 경제 사정이 조금 빠듯했던 덕분에 자주 찾던 시계 중고 장터를 기웃거렸고, 적당히 좋은 조건에 올라온 PAM510을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월드에 추가금을 얼마간 얹어주고 교환하게 되었다.


간단 스펙

모델명          : PAM00510(a.k.a PAM510)

직경              : 44 mm

러그 투 러그 : 53.5 mm

러그               : 24 mm

두께               : 14 mm

방수                : 30 bar (~300 metres)

기능               : 시, 분, 초

특징              : 수동, 파워리저브 8일


PAM510의 매력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디자인

파네라이의 디자인은 오묘하다. 다이얼 자체는 분명 수수하고 단순한 디자인인데 특유의 폰트로 끌리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다이얼을 독창적인 디자인의 케이스에 결합시켜 자기만의 매력을 완성해 낸다.

맛있는 탕수육을 앞에 두고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맛있는 장어를 앞에 두고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책과 맥주를 옆에 배치하고 허세샷을 찍게 만드는 얼굴
가족과 함께 유교전에 가서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친구들과 함께 맥주 마시러 가서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아내와 와플 버거 먹고 인피티니 워를 보면서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화창한 여름날 교외로 나들이를 가서도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사진을 찍게 만드는 얼굴


파워리저브가 8일이나 되는 자사 수동 무브먼트

PAM510에 탑재된 무브먼트는 P.5000이라고 부르는 수동 무브먼트다. 사실 뒷면으로 보이는 무브먼트의 모습이 이쁘다고 할 순 없다. 너무 많은 부분이 그다지 특별한 장식이 없는 플레이트로 가려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기능이 좋아 다 용서된다. 파워리저브가 무려 8일이다! 기계식 시계로 범위를 한정 지으면, 이렇게 긴 파워리저브를 가진 기계식 손목시계는 많지 않다. 분명 내세울 만한 매력이고, 그래서 다이얼에도 8 days라고 써놓고 무브먼트에도 EIGHT DAYS라고 써놓았다.


이 무브먼트에는 로터가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손목에 차고 있어도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지 않는다. 감아놓은 태엽이 다 풀리면 손으로 다시 감아줘야 한다. 누군가에겐 이게 귀찮은 작업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이 작업이 시계를 가지고 노는 재미가 되기도 한다. 당시엔 그렇게 태엽을 감아 시계에 밥을 주는 행위 자체가 재밌어서 매력으로 다가왔다.


줄질 놀이

파네라이에는 여러 가지 소재로 만든 다양한 색상의 스트랩이 다 잘 어울린다. 잠수부를 위한 시계라는 태생을 생각하면 물에 취약한 가죽 소재의 스트랩이 조금 미스매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시계를 차고 진짜 물속에 들어가 잠수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할 테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가죽 스트랩이 너무 잘 어울려서 미스매치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시계를 사고 나면 자꾸 시계 줄을 또 사고 싶어 진다. 돈을 이미 왕창 썼는데 자꾸 또 돈을 쓰고 싶어 지게 만든다는 말이다.

나는 주로 위 사진에 나오는 세 가지 스트랩을 번갈아 체결해 가며 차고 다녔다

이렇게 다 잘 어울리기 때문에 애프터 마켓 스트랩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다. 여러 가죽 공방에서 자기 이름(혹은 애칭)을 내건 스트랩을 팔고 있는데 그중에서 스트랩을 잘 만든다고 입소문을 탄 제작자의 스트랩은 가격도 비싸고(몇 십만 원 대) 대기 기간도 길다.


일반적인 소가죽 스트랩과 악어가죽 스트랩은 물론, 여러 가지 색상으로 만든 고무 스트랩과 직물 소재의 스트랩, 그리고 한때 엄청나게 유행했던, 군인들이 사용했던 탄약 가방의 가죽을 사용해 만든 아모(ammo) 가죽 스트랩까지 아주 다양해서 시계 하나로 여러 가지 느낌을 낼 수 있다. 이렇게 시계에 스트랩을 바꿔 껴가며 노는 걸 보면 마치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다.


파네라이에서도 아래와 같이 직접 여러 종류의 스트랩을 팔고 있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텍스타일 스트랩이 아주 괜찮아 보인다. 다음에 또 파네라이를 들이면 저 스트랩을 채워봐야겠다.


광선 같은 야광 성능

보통 잠수부를 위한 다이버 시계는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깊은 물속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시, 분, 초침과 다이얼의 숫자 인덱스에 야광 물질을 발라 놓는다. 이때 사용하는 야광 물질에도 그 밝기와 지속력에 따라 등급이 있다고 하는데 파네라이에선 최고 등급을 발라놓는 것 같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모든 시계 중에서 야광 능력만큼은 정말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밝기도 밝고 지속력도 뛰어나다. 내가 이 시계를 차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을 만큼 깊은 물속에 들어갈 일은 없을 테지만, 그냥 방에서 불 끄고 봐도 기분이 조크든요.


마치며

보다 전문적인 리뷰를 보고 싶다면 호딩키에 올라온 리뷰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파네라이는 케이스 디자인에 따라 크게 루미노르와 라디오미르로 나뉜다. 용두 쪽에 용두 가드가 있는 형태를 루미노르라고 부르고 없는 형태를 라디오미르라고 부른다.

루미노르 디자인으로 한 번 차 봤으니 다음엔 라디오미르 디자인으로 도전해 볼 생각이다. 지금 마음에 두고 있는 모델은 위 사진의 PAM620 모델이다. 케이스의 크기와 디자인뿐 아니라 다이얼의 폰트와 발라놓은 야광 도료의 색도 미묘하게 다르고 무브먼트도 자동이다. 파워리저브가 3일로 PAM510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고 방수 성능도 10 bar로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어디까지나 다 상대적인 것이고 실제 사용할 땐 전혀 불편할 것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만 역시 가격이 문제...


마무리는 다소 괴상해 보일 수도 있는 주머니 샷으로 하겠다. 남들이 주머니에 손 넣은 상태에서 시계 사진 찍어 올려놓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 해 보았는데 혼자서 왼손을 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찍으려니 쉽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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