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에 꼬르륵이 사는 소녀(12)
꼬르가 증발했다. 그렇게나 원하던 일이었다. 꼬르가 뱃속에서 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예민한 감각도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끄러운 잡음과 악취 속에서 괴로웠던 날들도 안녕이다. 더 이상 외출했을 때 꼬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우와...
오래전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뱃소리 콤플렉스를 안겨준 그날이었다. 오랫동안 힘들어했다. 그런데 꼬르가 나타나고 옛날 뱃소리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큰 소리, 꼬르가 있었으니까. 이제 꼬르도 사라졌겠다, 자유롭게 다니고 살 수 있다. 허무했다. 그동안 고작 이 작은 뱃소리를 가지고 사람들 눈치를 보고 살았구나.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버텼구나. 기쁘다. 기뻐야 하는데, 서럽다.
외로웠다. 엄마 아빠는 항상 바쁘고, 동생은 내가 돌봐야 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많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커가면서 알았다. 사람은 원래 외롭다. 태생적으로, 기대고 싶어도 기댈 곳이 없다. 혼자다. 혼자 살아야 한다. 내가 만든 대외적인 모습을 유지하기가 벅찼다. 점점 사람들과 선을 그었다. 그런데 꼬르가 선 안으로, 아니, 뱃속으로 들어왔다. 같이 사는 건 괴롭고 즐거웠다. 꼬르랑 함께여서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꼬르를 불렀다. 잠결이었다. 원래 꼬르를 부르면,
"왕왕"
대답하던 녀석이었다.
"꼬르야?"
"..."
고요한 새벽이다. 두 팔로 가슴을 짓누른다. 배에서 소리가 날 것 같으면 온몸을 한 곳에 몰아넣는다. 움츠리고, 힘을 준다. 반사적으로 배를 가린다. 체력이 없으면 잠에 드는 게 힘겨웠다. 굳은 몸이 풀리지 않았다. 이가 닳고, 뼈가 부딪혔다. 몸을 좌우로 뒤집고, 엎드렸다, 벽에 다리를 올려놨다. 땀에 머리카락이 엉겨 붙었다. 무릎을 꿇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가, 어둠에 익은 눈이 방안 곳곳을 새삼스레 쳐다봤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 한 점으로 빨려 드는 것 같다. 지쳐 잠에 들었다.
문을 뚫고 들어온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빨간색의 크고 기괴한 얼굴이 코에 닿을 듯 가깝다.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일 때면 누가 문을 따고 들어와 덮치는 상상이 재생됐다. 오늘 하루 누군가와 엮인 일은 그날 밤 수없이 상영되었다. 꿈에서는 사건이 각색되어 반복 재생되었다.
꼬르가 꿈에 나왔다. 본 적도 없는 녀석이라 깨면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았다. 배를 찢고 나와, 조그만 녀석이 방방 대며 넓은 들판을 뛰어다녔다. 날 향해 짖었고, 나도 그 녀석을 따라 뛰었다. 뱃속에 있을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뱃속엔 꼬르가 남아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평생 함께일 수 있을까. 아님 병이었을까. 너는 날 떠나 자유롭고, 나는 네가 남아 다행일 텐데.
요즘 네가 좋아하는 사과도 먹고, 육포도 먹어. 치킨도 많이 사줄게,
"꼬르야..."
"..."
"... 컹"
꼬르였다. 목소리가 전보다 낮았다. 눈이 뜨였다.
"꼬르야!"
"크르... 컹!"
변성기를 맞은, 진짜 꼬르였다. 드디어 아침이 왔다.
"금식은 다신 안 할게. 미안해. 꼬르야."
각서를 썼다. 난 동물학대범이다. 꼬르를 굶겨 죽이려고 했다. 꼬르와 나는 한 몸이니까 꼬르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내 몸을 아끼기. 이름 오른쪽에 서명을 했다. 꼬르의 서명은 음성으로 했다.
꼬르가 돌아왔다. 8월 검정고시를 접수했고 사회화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사과를 많이 많이 먹었고, 무지개 떡도 먹고, 치킨도 3마리는 먹었다. 목구멍까지 음식물이 넘어올 것 같았지만, 행복했다. 그래,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