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정성이라는 최고의 조미료 ‘수제’

변하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할 때

by 고첼

서기 2017년,

다소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며, 잘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당당히 나왔었습니다. 그리고 3개월동안, 집 앞에서 따릉이를 타고 성수동에 위치한 교육기관을 통학하며 숨죽인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눈칫밥을 눈물에 찍어 먹으며 성수동에 상주하게 됐죠. 평소에 성수동이 ‘핫’하다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막상 성수동에서 거지짓 하고, 아니,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뭐가 ‘핫’ 한 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성수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결과 한 가지 오묘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성수동은 낡음과 세련됨이 잘 믹스매치 되어있는 것이.. 뭐랄까.. 애플의 신제품 발표 무대 위에 스티브잡스의 촌스러운 패션과 같다고 할까요? 스티브잡스의 명성과 애플의 세련된 디자인이 GD도 소화하지 못할 것 같은 잡스의 후줄근한 패션을 희한하게도 ‘간지’로 승천 시킨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낡은 공장들이 즐비해 있는 곳 중간중간에서 피어난 카페와 수제맥주집, 그리고 수제구두 공방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아이폰X의 디스플레이 마냥 더욱 선명해 집니다. 왜 우리는 이런 낡음 안에서 피어난 모던한 디자인이 더욱 힙하고 세련되었다고 느끼는 걸까요?


jobs.jpg 한결같은 잡스의 패션. 왜 멋지게 느껴질까....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지난 3개월간 성수동에서 도를 닦은 결과 그것들이 세련되어 보이는 이유는

‘시간’과 사람의 ‘손때’ 에 의해서 빚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제, 시간, 손때... 정성

생각해 보면, 시간과 손때(정성)가 듬뿍 들어간 것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가치 있다고 인식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는 ‘수제’라는 작위가 수여되죠.

수제맥주, 수제구두, 수제가방 등 심지어 돈까스에도 수제라는 단어가 붙으면 왠지 500원정도는 더 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실 우리도 다 압니다. 맥주도 구두도 가방도 이제 100% 수제는 거의 없다는 것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시간과 정성이란 조미료가 첨가된 것은 분명히 그 결이 다르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수동의 대림창고나 카페 어니언과 같이 낡은 창고나 부지를 업사이클링 해서 재해석한 곳에서 우리가 느끼는 세련됨은 아마 지나온 세월과 그곳에서 땀을 흘리며 일했던 이들의 정성의 흔적이 현재의 우리에게 전달 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많은 것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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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에서 피어나는 세렴됨

디지털 시대를 넘어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가치 있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 카톡 보다는 삐뚤빼둘 쓴 손편지가 연인을 감동시키고, 화면을 터치하며 넘기는 사진과 글 보다는 직접 인쇄한 사진이나 침을 묻혀가며 넘겨 보는 한권의 책에게 우리는 왜인지 모를 감정을 투여합니다. 음식과 맥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주문 즉시 툭툭 튀어나오는 프랜차이즈 햄버거 보다는 눈 앞에서 구운 패티에 겹겹이 쌓아 올린 수제햄버거가 먹기에는 더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보이고, 우리 맥주가 제일 맛있다며 외쳐대는 광고 속 맥주보다는, 맥주 자체에서 질 좋은 재료가 느껴지고 따르는 사람의 정성이 녹아 든 자그마한 부루펍의 수제맥주 한 모금이 입을 넘어 마음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IMG_5202.jpg 수제버거는 참 먹기가 힘든데 맛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시간과 정성이란 조미료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의 소스가 아닐까도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로봇의 개그나 노래를 보고 듣고 웃거나 감동 받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진수 성찬이 있더라도 로봇 쉐프가 만들어 주는 음식보다 투박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시간이 지나도 지상 최고의 음식이겠죠. 시간이 지날 수록 음식도, 맥주도, 옷도, 사람도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해가겠지만, 우리가 성수동 거리가 세련됐다는 인식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수제맥주도 수제구두도, 그리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투박한 된장찌개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고 지속 되겠죠.


우리는 요새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요? SNS로 소통과 시간을 허비하고, 자극적이기만한 음식과 광고에 열광하고, 사람을 취하게만 만들려는 맥주나 술을 마시며 힘든 일상을 지우려 합니다. 안 그래도 힘든 인생에서 자신을 힘겹게 만드는 변하는 것들에 집중하기 보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우리를 건강하게 하는 어머니의 된장찌개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에 집중을 해야하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 자신들만의 시간과 손때 가득한 최고의 조미료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는 한 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수제맥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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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이 들어간 것에서 수제맥주와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일맥상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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