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꿈을 꾼 것은 미처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기도 전이었다. 꿈속에서 백철은 따사로운 햇빛이 밝게 비쳐드는 거실로 들어선다. 낯익은 신혼집,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아내 승아가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품에 안은 것을 흔들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그녀를 백철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승아야… 뭐 하는 거야?"
그녀는 갓난아이처럼 생긴 목각인형을 품에 안은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여보, 우리 아기 너무 이쁘지?"
"아기라니? 그게 뭔데?"
백철은 손가락으로 인형을 가리키며 묻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천진하게 되묻는다.
"뭐냐니? 우리 딸이잖아."
아내의 말에 백철은 공포에 질리지만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목각인형을 재워주는 아내를 바라보며 백철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기 시작한다. 아내의 품에 안긴 목각인형은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지만… 그는 분명 알 수 있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으아아아악!"
백철이 잠에서 번쩍 깨어나며 비명을 지르자 자던 아내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어머! 깜짝이야! 왜 그래, 여보?"
"어? 아… 꿈이구나."
"땀 좀 봐, 세상에."
승아가 안도하는 백철의 이마를 손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악몽에서 깨어날 때면 백철은 그 끔찍한 광경이 현실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깨어있는 지금 이 순간이 되려 꿈인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뒤따르는 것이었다.
"요즘 계속 같은 꿈 꾸는 거 아니야?"
"아냐… 신경 쓰지 마."
둘은 서로의 손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어느새 새근새근 잠든 승아 아내 옆에서 백철은, 그러나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밤새 잠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매일 밤 반복되는 악몽. 아내는 궁금해했지만 백철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꿈에서 느껴지던 기분 나쁜 현실감 때문이었을까. 입 밖으로 뱉는 순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현실이 되고 말 것 같은 불쾌한 예감 때문에.
태동
"이사? 갑자기 왜?"
오래 잠을 자지 못해 수척해진 얼굴로 백철이 물었다. 승아가 연어를 오물오물 씹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이 집, 뭔가 이상해."
"뭐가?"
"당신 밤에 악몽 꾸기 시작한 거…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부터잖아."
아내의 말에 백철은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난 또 뭐라고. 그냥 요즘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고…"
"왜? 또 뭐 문제 있어?"
승아가 우물쭈물 망설였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듯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백철이 굳이 더 묻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잖아. 우리 형편에 지금으로선 이 집이 최고야."
"백철 씨뿐 아니라… 이 집 오고 나서 나도 좀 이상해."
"그러니까 뭐가 이상한데?"
승아가 자꾸만 빙빙 말을 돌리자 백철이 못 참고 채근했다. 한참을 뜸 들이던 승아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즘 이유 없이 자꾸 살찌는 거 같아."
귀엽기는.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백철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부터 먹고 싶다고 보채 사다 준 연어 초밥을 두 팩 째 해치우고 있으면서 집 핑계라니.
"살이야 먹으니까 찌는 거지. 그게 집이랑 무슨 상관이야?"
"진짜 이상하다구. 먹는 것도 없는데 며칠 사이에 체중이 확 늘었다니까."
백철은 곁눈질로 승아의 몸을 훑어봤다. 미묘하게 볼록해진 승아의 배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여보, 먹는 게 없는데도 살이 찔 수 있으면 전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
"우욱… 우웁!"
승아가 갑자기 손으로 입을 감싸 쥐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놀란 남편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움켜쥐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자기야! 괜찮아?"
선물
다음 날 오후. 백철과 승아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막 기쁜 소식을 전한 의사의 환한 표정과 부부의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 대비됐다.
"임신… 이요?"
백철이 물었다.
"벌써 16주 차라 성별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보다 의심과 난처함이 앞서는 부부의 반응에 의사는 의아했다.
"생리 주기로 이미 예상하고 계셨을 텐데요?"
"아니요, 평소랑 똑같았는데…."
"네? 그럴 리가 없는데…."
놀란 의사의 반응에 백철은 복잡한 심경으로 승아를 바라봤다. 승아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부는 말이 없었다. 백철이 기운 없는 아내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 억지로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축복이야, 여보! 노력해도 안 생기는 부부들이 천지인데."
"싫어. 당신도 알잖아? 누구 엄마 소리 들으면서 사는 거 싫다고 결혼 전부터 누누이 말했어, 나."
"그래. 그러던 사람들도 자기 애 생기면 생각 달라진대. 너무 걱정 말고 잘 키워보자."
백철은 아내의 손을 꼭 쥐며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왜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여보, 저녁은 어떻게 할까?"
집에 도착한 승아는 백철의 질문에 대답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철은 굳게 닫힌 문을 씁쓸하게 바라보다가 담배를 꺼내 물고 베란다로 향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라이터를 쥐고 불을 켜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이것도 끊어야겠네. 이제 애 아빠 됐으니."
백철은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버린 뒤 잠시 망설이다가 담뱃갑을 구겨 마당에 멀리 던져버렸다. 선선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몸을 돌리는데,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뭐야…."
백철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재차 두 눈을 세차게 비벼댔다. 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베란다 한 구석 낡은 의자 위엔, 아기처럼 생긴 작은 물건 하나가 놓여있었다. 백철은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몸이 꿈에서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반복해서 확인하지 않아도 백철이 몰라 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