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총무의 기묘한 이야기
그날 이후 백철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던 장면들이 이제 눈앞의 현실이 됐기 때문이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승아는 아기에게 푹 빠져있었다.
"승아야…."
"아이, 예뻐. 어쩜 이렇게 아빠랑 똑 닮았을고?"
품에 안고 있는 그 아이는 세라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내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슬픔을 잊은 아내를 보며 백철은 입을 다물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백철은 승아와 그 아기를, 아니 그 인형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악몽 같던 몇 개월은 금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8년 후
후미진 산골 마을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뛰놀고 있었다. 교무실은 한적했다. 올해 처음으로 근무 발령을 받은 혜린은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엑셀 파일로 학부모 정보를 뒤적이며 전화를 돌리는 게 그녀의 개학 첫 주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세라 아버님. 다름이 아니라 개학 첫 주엔 1학년들 학부모님 상담이 있어서요."
밝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용무를 알렸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 아버님? 들리시나요? 혹시 시간 되는 날 학교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힘들 것 같습니다."
"네? 아, 오기 힘드시면 전화 상담도 가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혜린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혼잣말했다.
"뭐야, 하여튼 부모라는 사람들이. 그나저나 세라가 누구였더라?"
그녀는 학생 정보를 유심히 살펴봤다. 세라의 사진을 찾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특이하게 생겼네…."
세라라는 아이의 얼굴은 분명 뚜렷한 이목구비지만 어딘가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마치 어릴 적 동화책에서 봤던 존재를 연상시키는 피부색과 윤곽. 혜린은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한동안 궁리했다. 사람의 피부라지만 보다 거칠고 차가운 질감의, 혹 사람이 아닌 것도 같은 기괴한…
수업 종이 울리자 혜린은 공상에서 깨어나 교재를 챙겨 들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은 개학에 들뜬 아이들로 왁자지껄했다. 시설이 낙후된 터라 책상과 의자도 나무로 만들어진 구식이었다. 교실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미닫이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서자 나무 바닥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자, 여러분! 자리에 앉을까요?"
아이들이 서둘러 자리에 앉았고, 혜린이 한 명 한 명 출석을 불러갔다. 대답하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며 기억에 새겨 넣으려는 듯했다. 그러다 그녀가 한 아이의 이름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정세라?"
"네."
혜린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생기 넘치는 친구들 사이에 초점 없는 눈과 표정 없는 얼굴로 마치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앉아있었다. 사진보다 더 특이한 느낌이네. 혜린은 생각했다. 그 와중에 옆자리 친구들과 끊임없이 떠들고 장난치는 학생들을 통제했다.
"여러분, 조용! 지금 놀이 시간 아니죠?"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잠시 뒤 세라의 옆자리 남자아이가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요?"
"응? 뭔데, 승철아?"
혜린의 질문에 승철은 뾰족한 연필을 들어 올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세라의 머리를 거세게 찔렀다. 연필이 콰직 소리를 내며 세라의 옆통수에 꽂혔다.
"어머! 승철아! 무슨 짓이야!"
기겁한 혜린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지만 정작 머리를 찍힌 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애당초 이 아이는 눈을 전혀 깜빡이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에… 괜찮니? 안 다쳤어?"
혜린이 세라의 머리를 살피며 물었지만 아무리 봐도 다친 상처는 없었다. 승철이 키득대며 웃었다.
"괜찮아요! 얘는 이런 걸로 찔러도 안 아프대요. 짱이죠?"
혜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혜린의 분노가 무색하게도 찍힌 자리에 자국 하나 남지 않은 세라는 여전히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세라를 살피던 혜린은 승철을 재차 꾸짖었다.
"너! 뒤에 가서 손들고 서있어!"
"왜요! 싫어요! 쟤 봐요! 하나도 안 아파하잖아요!"
그때 세라가 승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뻑뻑한 인형 관절을 돌리듯 삐걱대는 소리가 교실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승철 쪽을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여전히 세라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승철아."
"어?"
"너는 내가 부러워?"
갑작스러운 세라의 질문에 승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뭐래! 아니거든! 우웩! 토 나와!"
"나도 네가 부러워."
세라의 말을 듣는 순간 혜린은 아까 전 교무실에서 기억해 내려 애썼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마침내 떠올렸다. 피노키오. 이 아이는 인간 소년이 되고 싶어 모험을 떠났던 피노키오를 닮아있었다.
잠시 후 쉬는 시간, 혜린은 중년의 남교사와 창가에 서서 믹스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자마자 1학년 맡으려니 힘들죠?"
"아녜요. 아직은 괜찮아요."
"시골이라 시설도 다 구식이고, 신임 교사들한테 저학년 반 짬 시키고 그러긴 하는데. 그만큼 또 연차 쌓일수록 편해지니까 좋게 생각하라구."
그때 한 아이가 주춤거리며 혜린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미소를 띠며 아이에게 물었다.
"유정아, 무슨 일이야?"
"선생님. 김승철이요… 이상해요."
"승철이? 왜? 유정이한테 나쁜 장난쳤어?"
아이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혜린은 보다 심각한 일임을 직감하고 아이의 손을 꼭 쥐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이는 말없이 교실 방향으로 혜린을 이끌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아이와 함께 교실로 들어선 혜린은 난데없는 광경에 어안이 벙벙했다. 공포에 질린 반 아이들이 승철의 자리를 중심으로 원을 둘러 서있었다.
"얘들아, 무슨 일이니?"
겁에 질린 아이들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혜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뚫고 가운데로 다가갔다. 아이들이 그녀를 위해 길을 비켜섰다. 승철에게 다가가는 짧은 시간 동안 혜린은 수없이 눈을 비볐다.
"도대체 이게 뭐야?"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재차 확인하며 손가락으로 손등을 꼬집었다. 그러자 지금 눈앞에 놓인 그것이 자신의 착각도 아니며 꿈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이 금세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