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전까지만 해도 승철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와 똑같은 이목구비를 한 목각인형 하나가 나무 의자와 바닥에 반쯤 흡수돼 기괴하게 합쳐진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 같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혜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옆자리엔 세라가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얘들아, 승철이는 어디 있니?"
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손가락으로 목각인형을 가리켰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진땀을 흘리며 혜린은 목각인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몰래카메라인가? 만우절 장난인가? 온갖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세라야… 세라야?"
혜린이 조심스럽게 세라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세라는 아까와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혜린은 바싹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승철이는 어딨니?"
"제 옆에 있잖아요, 선생님."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세라의 목소리와 얼굴엔 전에 느꼈던 이질감이 없는, 평범한 아이의 그것과 똑같은 생기가 돌았다. 마치 누군가에게서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공포가 엄습했다. 설마 이 차디찬 나무 조각이 정말로 승철이란 말인가?
"계세요!"
혜린은 세차게 반복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자 주먹으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옆에 선 세라는 뻣뻣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세라 어머님!"
절규하다시피 외치며 현관을 부술 듯 때리는 혜린을, 세라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만 봤다. 혜린은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라야, 엄마 집에 계시다며?"
"엄마는 맨날 집에 있어요."
"그럼 지금도 계신 거야?"
"네, 그럼요."
"왜 대답이 없으시지? 잠깐 나가셨나?"
혜린은 현관 옆 창문을 들여다봤지만 집 내부는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다짜고짜 세라의 집으로 찾아온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었다. 단지 승철이가 사라진 일이 이 집과 뭔가 관련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밖에. 그때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누구시죠?"
혜린이 흠칫 놀라 뒤돌아섰다. 몹시 지쳐 보이는 몰골의 백철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센 바람에 마치 70대 노인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세라 담임교사인 최혜린이라고 합니다. 혹시 세라 아버님이세요?"
백철은 혜린의 존재에 아무 관심 없다는 태도로 다가와 도어록 버튼을 누렀다. 손에 들린 장바구니엔 휘발유와 진압봉, 소화기 등의 물건이 가득 들어있었다.
"저기… 아버님?"
백철이 말없이 집안으로 사라지자 세라도 아빠를 따라 휑하니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덩그러니 남은 혜린이 백철에게 외쳤다.
"죄송한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버님!"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계세요, 어머님?"
다들 어디로 사라졌는지 거실은 비어있었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지만 아무도 없는 폐가 같은 분위기였다. 거실 안으로 발을 내딛자 끼익, 나무 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본 혜린은 뭔가를 눈치챘다. 바닥의 재질이 이상했다. 통일되지 않은 여러 자재가 섞여 있는 듯했다. 분명 시멘트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안방에서 거실, 그리고 베란다로 이어지는 부분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나무가 자라 시멘트를 덮은 것처럼 구분되지 않은 영역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세라야!"
"네, 선생님."
세라의 목소리는 문 열린 베란다 바깥에서 들려왔다. 혜린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신중하게 거실을 가로질렀다.
"여기서 뭐 하니?"
바깥으로 나오자 테라스 한 구석에 낡은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엔 성인 크기의 커다란 목각인형 하나가 앉아있었다. 세라가 인형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다.
"엄마! 인사해! 우리 반 선생님이야."
"뭐? 엄마? 세라야, 너 무슨 소리를…"
"비켜요."
어느새 다가온 백철이 혜린을 밀치고 인형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세라가 학교에서…"
하지만 백철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거칠게 인형을 들쳐업었다. 그리고 말없이 난간을 넘어 뒷마당으로 향했다.
"세라야. 아버지 뭐 하시는 거니?"
당혹감에 혜린이 물었다. 세라가 대답했다.
"아빠는 저게 우리 엄마가 아니래요."
그때 백철이 인형에 기름을 붓더니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던 인형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질러대며 몸부림쳤다. 백철이 들고 있던 진압봉으로 인형을 내리찍었다. 무시무시한 광경에 혜린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엄마는 맨날 다시 돌아오거든요."
혜린은 혼비백산하며 세라의 집을 뛰쳐나왔다. 미친 듯이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대로변이었다.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 담벼락 너머에서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올라오고 있었다.
악몽
남편은 밥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잘못 본 거라니까."
"아냐. 똑똑히 봤어. 분명 살아있었단 말이야, 그 인형."
남편은 밥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린에게 말했다.
"자꾸 무리하니까 몸이 안 좋은 거야. 내 말대로 일 그만두고 쉬어. 이제 홀몸도 아닌데."
"쉬기는, 이제 막 내려왔는데."
혜린이 수저를 내려놨다. 밥맛이 없었다.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그녀는 걱정에 휩싸였다. 헛것을 본 걸지도 모른다. 혹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믿는 편이 나았다. 중요한 건 곧 태어날 아이였으니까.
"으아아악!"
"어머! 민규 씨, 또 왜 그래?"
그날 이후, 남편은 새벽마다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을 꾼다고 했다. 남편은 식은땀으로 젖은 채 바들바들 공포에 떨면서도 결코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꿈이야. 신경 쓰지 말고 자."
그리곤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생긴 양 입을 꾹 닫고 충혈된 눈으로 다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