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그 아이

매일 잠자리에 드는 건 새로운 죽음, 매일 일어나는 건 새로운 탄생이라며

by 장서율

샤워는 하루 일과의 끝이지만 참 하기 싫어 빈둥거리고 미룰 때도 많다. 하지만 씻고 나오면 꼭 새로운 내가 되는 것 마냥 많은 것들이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튀어나온다.


매일매일이 같아 보여도 사실은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날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내 마음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마련이다. 올해 하고 싶은 일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하지만 이전의 나처럼 구체적인 계획을 단기와 장기로 나누어 잡지는 않았다. 내가 얼마나 기록에 천착하는 인간이었냐 하면, 30년 전의 일기장까지 모조리 보관하고 있을 정도였다. 해외에 나와서 살면서도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들어갔다 오면서 이전에 쓰던 다이어리나 플래너를 연도 별로 들고 와서 가끔 들춰본다. 아주 놀라운 사실은, 2003년에 내가 했던 고민이나 최근 몇 년 했던 고민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말인즉슨,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나는 그냥 그런 성향의 사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지금 납득이 된 다음에 여기에 적기는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참 어려운 명제였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반의 한 이성 친구가 '삶을 힘들어하는 그대에게; 쇼펜하우어 잠언집' (뭐 이런 제목이었던 것 같다)라는 책을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다. 정작 내 마음은 표현을 잘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도 못하면서 나 자신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길, 내 문제에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헉헉대며 살았던 그때의 내 모습을 비춰준 그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 책을 선물했을지 이제와 생각해 보니 고맙고도 아련하다. 거기에 쓰여있던 말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매일 잠자리에 드는 건 새로운 죽음, 매일 일어나는 건 새로운 탄생이다'라는 말. 사람이 우울하고 힘들 때는 잠들 때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내 주변은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을 뜨고 깨어나면 어제의 그 이상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말 같아서 희망적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스한 햇살을 닮은, 키가 크고 해사하게 생겼던 그 아이가 좋아서 더 그랬을 거다. 그런 빛을 담고 싶었다. 그런 방향으로 나는 계속 걸어온 것 같다.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면 어떠나면서, 마냥 낙관하지도 마냥 포기도 하지 않고 나아갈 힘만 있다면 괜찮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그 다이어리와 플래너와 일기장에 엄청나게 많은 단기와 장기 계획표를 만들어 적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길을 에둘러 왔다. 어떤 틀이나 자격증 속에서 배울 수 없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조금만 눈을 떠 주변을 보면 한 순간에 알 수 있을 것들을, 굳이 굳이 벽에 부딪혀 가는 시도를 하며 아프게 배웠다. 열정의 크기만큼 이룬 것도 있겠지만, 놓친 것도 많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은 그런 계획표를 조금 내려놨다. 대신. 하고 싶은 걸 찾으려고, 또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찾아보려고 했다. 좋은 건 기다리지 말고, 하고 싶은 건 생업을 유지하는 선에서 지금 당장 해 보자 했다. 실컷 좋아하는 것들을 해 보고 나니, 저절로 덕질이나 여행, 와인 등에서 손이 떼어지고, 내 마음자리와 주변을 돌아보는 데 더 시간을 쏟게 되었다. 마룻바닥을 닦으며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이 소중해지고,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쓰며 기록을 남기는 게 감사한 일상이 되었다. 피곤해도 주중이며 주말에 요가 매트 위에서 여전히 낑낑대며 어깨를 펴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다.


오늘도 어디서건 꾸준히 무엇인가를 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했고, 그러면서도 나 자신과의 밸런스를 맞추며 살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를 이미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소중한 사람들, 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내 주변이 행복하려면, 나부터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임을 이제야 또 깨닫는다. 쇼펜하우어를 말하다가 생각난 독일어 한 마디, 아우겐 블리크 (Augenblick)를 소개한다. 위키에는 moment, blink of an eye (very short period of time)라고 나와 있으며 '순간, 혹은 찰나'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하기 문구는 네이버 블로그에서 찾았다.


순간을 지배하는 자가

삶을 지배한다

Die Herrschaft über den Augenblick

ist die Herrschaft über das Leben

[디 헤어 샤프트 위버 덴 아우겐 블리크

이스트 디 헤어 샤프트 위버 다스 레벤]

[출처] 독일어 명언 : 순간을 지배하는 자가 삶을 지배한다|작성자 시원스쿨 유럽어


이 말은 곧, 순간의 깨달음을 잊지 않고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과도 같아서, 독일어를 배우던 친구에게 들은 이후로 잊히지 않는다. 인생을 알게 되는 건 순간,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가 남는 건 영원. 가족이든 친구든,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표현하지 않는 마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것들도 회한으로 남을 테니, 이제는 좀 하고 살자. 고 3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 그 친구에게 '네가 옆에 있어서 참 좋았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고마워 친구. 내 너의 이름을 아직 기억한다오.


추신 : 저 사진은 2003년, 여행 중에 발견한 벚꽃 새순. 내 인생에 다시 봄이 오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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