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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율 Sep 06. 2021

파도 자국

 사랑은 멀리 있지 않아

준철이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키려 기지개를 켠 것은 비가 촉촉이 내린 일요일의 아침이었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분명 늦잠 잤을 거야.

모처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주말에 그는 잠에서 깨어 가만히 조용한 방 안을 훑어보았다. 

회색과 흰색, 검은색이 뒤섞인 정갈하지만, 무미건조한 방 안의 공기.


비가 다시 내렸다. 은빈 선배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장례식의 밤이 떠올랐다.

소주 한 잔에 정신없이 마음이 취하던 그 밤에, 지우라는 사람을 따라 나갔던 은빈 선배는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준철의 마음속에서는 불꽃이 타오르다 사그라든 것 마냥, 조용히 불씨가 남아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다 타버려 재가 되면 좋으련만. 은빈 선배를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뜨겁게 시렸다.


몇 주 동안 그녀에게 연락을 해 보지 않았다. 그녀가 괜찮을 거라고 믿었고, 그 자신도 괜찮으리라 다짐하면서 일만 해 왔었다. 너무 많이 생각했기에 오히려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상대도 있음을, 준철은 은빈을 생각하면서 깨달았다. 대수롭지 않게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었으면.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만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있는데 조용하던 휴대폰이 울렸다. 


은빈 선배였다.


- 준철아.

-.. 네.

- 잠깐 나올래. 너희 집 앞이야.

-.. 네.


한참을 걸려 씻고 단장을 했다. 준철은 뭔가가 석연치 않았다. 약간은 불안했다. 은빈의 그런 서늘하고도 메마른 말투가. 그러면서도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무의식 중에 기다렸을 자신의 마음이 안쓰러워서, 그녀를 기다리게 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준철은 그런 자신이 참 별로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은빈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곁에 있어 달라고.

당신을 있는 그대로, 내게 달라고.


하얀 운동화에 회색 슬랙스, 검은 남방을 입고 그녀가 앉은 카페에 들어갔다.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머리에 새로 땀이 송글 맺혀 있음을 모르는 준철은 다소 느린 듯한 걸음으로 은빈의 곁에 앉았다.


-선배.


은빈은 화사한 녹색의 원피스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를 빛내며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슷한 화사함으로 준철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어쩔 줄 몰라 준철은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 그녀의 손에 악수를 했다. 


-악수하는 거야? 하하하. 준철아. 그날 이후로 연락을 하지 못해 미안해. 너에게 오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어. 너에게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은데, 들어줄 수 있을까?

-.. 네.


은빈의 대학생 이전 이야기들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낮고 담담하게 그녀 자신을 함부로 대해왔던 태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핑계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고 느꼈을 뿐이다. 상처 위에 상처가 얹어진 시간들을, 공유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준철은 비로소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비로소, 그녀는 온전한 모습으로 그의 곁에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한풀 꺾이며 노을이 찾아들 무렵까지, 그들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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