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흘러가는 길
가해자에게 서사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서율이 대학생이던 시절부터 20여 년쯤 지난 순간에서야 사람들은 결국 말하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들이 소리를 내어야 하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살다가 큰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다친 사람이 피범벅이 되었을 때 더럽다고, 무서워 보인다고 사람들이 욕하는 시대를 지나 조금은 달라졌을까?
서율은 울음 속에서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피가 고여 보이지 않았던 찢어진 심장이, 눈물로 씻어내니 그 근원이 어딘지 비로소 보이는 것 같았다.
애써 보이는 걸 보지 않으려고 살아왔던 20년이 가해자의 죽음으로 인해 마침내 빗장이 풀리고 피해자인 그녀 자신의 삶이 용서받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서율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발버둥 쳤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돈을 좇았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도 상처는 그 틈이 좁혀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썩어갔던 것이리라.
지우에게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털어낼 수 없었던 일들.
그리고 이젠 지율이. 지율이라는 혈육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서율 그녀 자신이 헛되게 살지는 않았을 증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지율이를 위해 서율이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녀는 뭐든 다 해서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울면서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이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내 안의 슬픔에 대해 모두 다 너에게 말했더라면
너는 분명 나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런 빛이 없는 밤하늘에 빛나던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내일은 병원으로 가서 지율의 주치의와 신장 이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정신과적인 치료에도 뭔가 그녀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는지 상담이라도 받아보자. 정신없이 울면서도 그녀는 가열하게 생의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만이 서율이 그동안 살아낸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태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