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53)

by 곡도




“너, 현태 아냐?”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린 현태는 뒷골이 바짝 설 정도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어른어른 아는 얼굴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재황이?”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일부러 떠올리려 했다면 절대로 생각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임마. 너 살아 있었구나. 야, 진짜 오랜만이다.”

재황은 현태의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워했다. 크게 벌린 입모양과 휘어지는 눈꼬리가 진심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태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미 10년 전에 끊어진 인연인데 새삼 반가울 게 무엇인가. 만약 현태 쪽에서 먼저 재황을 발견했다면 슬그머니 피해버렸을 것이다. 재황은 그의 옆자리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너 학교 그만두자마자 나도 곧바로 군대 가는 바람에 서로 연락이 끊어졌잖아. 군대 갔다 와서 너한테 연락하려 해도 네 연락처를 아는 놈이 있어야지.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뭘 하고?”

“아, 나는 그냥 장사해.”

“장사? 이야, 너 사장님 됐구나? 어떤 장사인데?”

“꽃집이야.”

“꽃? 꽃이라고? 네가 꽃집을 한다고? 아니, 어떻게,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데? 꽃이라니.”

재황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는 너는 어때?”

현태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재빨리 재황의 말을 끊었다.

“나는 고지식해서 딴 거할 생각도 못했지, 뭐. 변호사 됐어. 얼마 전에 개인 사무실 냈고.”

“그래? 잘 됐네. 축하한다.”

“글쎄다. 잘 된 건지 어쩐 건지 모르겠네. 완전히 빛 좋은 개살구야. 사무실 내느라 대출받은 걸 언제 다 갚을지 까마득하다, 야.”

혹여 자신이 뻐기는 것처럼 보일까봐 재황이 신경 쓰는 게 현태의 눈에 뻔히 보였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뭐.”

“그래, 그렇지. 아, 그런데 너도 여기 집회에 참가하러 온 거야?”

“어, 뭐어, 한 번 들려봤어. 너는?”

“나는 여기 철거민 측 소송을 맡은 인권변호사 연대 소속이거든. 그래서 거의 매일 이리로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어.”

“아, 그렇구나. 좋은 일 하고 있네.”

'인권'과 '변호사' 타이틀 중 하나만 있어도 폼이 날 텐데 둘 다라니. 현태는 재황의 대학시절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그래서 이번 재판은 어떻게 될 거 같아?”

“아아, 재판?”

재황은 사방을 둘러보더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그게 좀 힘들 거 같아.”

“그래?”

“안 그래도 며칠 있으면 공판인데 걱정이 태산이야. 어쨌거나 화재의 발단이 철거민이 던진 화염병인데다가, 불법 농성이었고, 망루 안에 위험 물질도 너무 많이 있었단 말이야. 경찰의 강제 진압이 위법하다는 걸 입증하기도 쉽지가 않고. 하여간 상황이 좋지는 않아.”

“그래?”

“하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냐. 경찰이 아직 수사 기록을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재판부에서 계속 자료 제출을 요청하고 있거든. 그게 무려 3000 페이지짜리야. 그 수사 기록이 공개되면 무언가 새로운 국면이 될 수도 있겠지. 언론도 지금 우리에게 유리하고. 어쨌거나 이건 상식선에서 판결돼야만 해. 너도 장사를 하니까 누구보다 공감할 거야. 빚까지 지면서 2억을 들여서 인테리어를 해놨는데 몇 달 만에 2000만 원만 받고 나가라고 하면 누가 알았습니다 하고 순순히 나가겠냐. 나 같아도 망루 짓고 올라가서 화염병, 아니 수류탄이라도 까겠다.”

재황의 목에 핏대가 섰다.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황의 말이 옳았다. 약자들의 말은 언제나 옳으니까. 비꼬는 게 아니다. 그들이 옳지 않았다면 약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모든 일에 분노할 권리가 있고, 그들과 논쟁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망루를 짓고 올라가 불붙은 화염병을 던졌을지 현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넌 잘할 거야. 넌 학교 다닐 때도 모의재판에서 진 적이 없잖아.”

“하하. 그거야 그렇지. 내가 이 주둥이 하나는 타고났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엄마도 입씨름으로는 나한테 두 손 두 발 다 드셨으니까. 말 못 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냐고 학을 떼셨지.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하는 건가봐. 말 못 하고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이야."

재황은 짐짓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었고 현태는 그냥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재황이 입을 열었다.

“세상이 참 엉터리야.”

재황은 침울한 눈빛으로 분향소 사진들을 가리켰다.

“이걸 봐. 모든 게 점점 더 악화될 거야. 가진 놈들은 더 뻔뻔하고 교묘하고 음흉해질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손도 쓸 수 없을 만큼 말이야. 직업을 만든 뒤 착취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나서 재건하고, 돈을 빌려 준 뒤에 파산시키고, 후진 재품을 팔아치우고는 새 모델을 출시하고, 투자를 받고는 부도를 내고, 병을 퍼트리고 나서 치료해 주는, 뭐 이런 세상이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짐작도 못할 만큼 엉터리라니까. 정말 뭐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그 배후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음모란 말이야?”

현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재황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어쩌면 저렇게 수철이 했던 얘기와 비슷할까. 만약 수철과 재황이 만났다면 정말 대단했을 것이다. 서로 목청을 높여 가며 밤이 새도록 음모에 대해 떠들어댔을 게 분명하다. 현태는 그 모습이 눈앞에 훤히 떠오르는 것 같아 웃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은 했어?”

재황이 헛기침으로 숨을 고르며 화제를 바꾸었다. 거하게 정색을 한 게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니, 아직. 너는?”

“나는 했어. 애도 있는데.”

“그래? 딸? 아들?”

“딸이야. 벌써 4살이야. 요새 부쩍 말도 많아지고 고집도 세져가지고 지 엄마가 어찌나 애를 먹는지. 꼬물거리는 핏덩이 탯줄을 잘라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상전 노릇을 하려고 한다니까. 애 크는 걸 보면서 세월 가는 걸 안다더니, 내가 그렇게 산다.”

빙그레 웃는 재황을 현태는 다시 바라보았다. 대학시절 재황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시 현태에게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의 재황은 현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재황은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사람도 좋아 보였고, 하는 일도 좋아 보였고, 본 적이 없는 그의 가족도 좋아 보였다. 참으로 가상하고 존경할 만한 삶이 아닌가.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 살지 못했는지 현태는 새삼 의아해졌다.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만약 그의 어머니에게 원하는 아들을 골라보라고 했다면 딱 이런 아들을 선택했을 것이다.

“좋아 보이는구나.”

현태는 진심으로 말했다.

“좋기는. 사는 게 다 그렇지.”

재황은 어깨를 으쓱했다. 스스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악의 없는 교만이 정전기처럼 바스락거렸다. 자, 그럼, 하며 현태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아침 일찍 가게를 열어야 해서.”

“아, 그럴래? 그래. 피곤하겠다.”

재황도 따라 일어섰다. 이제 가장 어색하고 귀찮은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었다. 현태는 자기 쪽에서 그 역할을 떠맡기로 했다.

“명함 있으면 하나 줘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

“아, 그래, 그래. 여기 있어. 네 것은?”

“빈손으로 와서 명함을 안 가져왔는데.”

“그럼 여기 핸드폰에 번호 좀 찍어 줘. 석현이하고, 필성이하고, 필성이 기억하지? 다 같이 한 번 만나자. 옛날 얘기도 하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도 좀 들어보고. 야, 우리 앞으로는 좀 만나면서 살자.”

“그래, 그러자. 자, 여기. 어쨌거나 네가 고생이 많네. 좋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니까 좋은 결과가 있겠지.”

“정말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래. 그럼 수고해라. 나 갈게.”

돌아서려는 현태의 손을 재황이 덥석 잡아끌었다.

“꼭 또 보자.”

재황의 손을 힘차게 맞잡아주고 돌아서면서 현태는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재황이 정말 전화를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또 재황에게 전화가 온다 해도 만나러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방금 마주 잡은 손의 따듯한 감촉만은 정직했다. 그는 가만히 수철의 손의 감촉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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