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65)

by 곡도




현태는 일찌감치 출근했지만 곧바로 가게 문을 잠가 버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을 뒤적였다. 가게를 부동산에 내놓은 뒤부터 아예 장사는 뒷전이었다. 하루 이틀 더 벌어보겠다고 두 손을 떨어가며 꽃을 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족들에게는 가게가 팔린 후에 병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현태에게 어떤 착실한 계획이나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가족들에게 병을 알리는 것만큼은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현태는 딱히 목적도 없이 인터넷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세상은 온통 거창하고 대단한 얘깃거리들로 매일매일이 시끄러웠다. 전쟁에, 무역 협상에, 테러에, 부동산 규제에, 코스피 하락에, 상속세 조정에, 정치 공세에, 국감에, 선거에, 고소 고발에, 마약 사범 검거에, 각종 사건 사고에, 해외 가수 내한에, 신작 드라마 발표에, 마라톤 대회에, 새로운 스마트폰 발매 등등등, 모두들 참으로 열심히 또 열정적으로 살고 있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태어나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이 생존 이상의 희망과 야심에 매달려 자신에게 주어진 고작 몇십 년의 삶을 악착같이 쥐어짜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곧바로 죽어가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죽어가는 게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최후의 순간까지, 언제나 전력을 다해 100%로 살아간다. 기원도 원인도 없는 그런 일방적인 열정과 헌신, 그리고 강박은 지독한 무지나 몰이해, 혹은 외면이나 회피, 혹은 기만이나 억압, 아니, 어쩌면 여전히 신과 같은 어떤 초월적인 신성함에 기대지 않고는 결코 설명될 수가 없다.

그는 문득 정민을 떠올렸다. 아무런 예감도 계기도 없이 잔잔한 수면 위로 또 다시 그녀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벌써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그의 빈틈을 쉽게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이미 30살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결혼은 했을까? 지금도 그렇게 어려움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일 년 반이나 사귀고도 가볍게 차버렸던 자신을 어쩌다가 한 번씩 떠올리기는 할까? 아니, 하다못해 이름은 기억하고 있을까? 현태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디서부터 떠내려 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했던 여자가 오직 한 명뿐이며, 그 여자가 정민이라는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현태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사람찾기’라는 사이트로 들어가 보았다. ‘옛 친구의 소식이 궁금하세요? 지금 그리운 사람을 찾아보세요’라는 안내문이 노란색 하트와 함께 야광빛으로 번쩍거렸다. 잠시 입을 헤 벌린 채 머뭇거리던 현태는 검색란에 '한정민'이라는 이름과 그녀의 생년월일을 입력하고 엔터를 눌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16개의 블로그가 일렬로 나타났다. 같은 날에 태어난 한정민들이 무려 16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날에 태어난 한정민이 이토록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은 그 한정민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그는 죄라도 짓는 사람처럼 - 마치 함부로 남의 집 안을 기웃거리는 그의 기척을 16명의 한정민들이 모두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듯이 - 숨을 죽이고서 차례차례 '한정민의 블로그'를 들어가 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은 이름만 같을 뿐 모두 제각기 다른 인생들을 살고 있었다. 어떤 한정민은 치과의사였고, 어떤 한정민은 연극배우였고, 어떤 한정민은 소아마비 환자였고, 어떤 한정민은 아이가 셋이었으며, 어떤 한정민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었고, 어떤 한정민은 어머니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고, 어떤 한정민은 햄스터를 키우고 있었고, 어떤 한정민은 며칠 전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했고, 어떤 한정민은 어제 저녁에 양고기 샤브샤브를 먹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너무나 생생하고 시끌시끌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그는 그 한정민들 모두를 잘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그는 11번째 한정민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한정민을 발견했다. 블로그에 들어가자마자 현태는 프로필 사진 속 여자가 정민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주황색 원피스를 입고 바람 부는 어느 바닷가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살이 많이 빠져서 눈두덩에 그늘이 생기고 머리스타일이 생머리로 변해 있었지만, 둥그런 얼굴 하며 빤한 눈매, 말아 올린 입 매무새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10년 전 경찰서에서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집착증 환자’, ‘스토커’, ‘사이코’라고 악다구니를 치던 그녀의 험상궂은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몇 번이나 그에게 말했었다. “사랑에도 정도가 있어.” 하지만 그로서는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정도를 넘어서는 것인데 정도를 지키라 하니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랑하는 정민은 언제나 그 정도 너머에 있는데 말이다. 현태는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을 엄지손톱으로 가볍게 긁어 보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살아있었다.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닌데도 그는 감격스러웠다.

현태는 그녀의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사진과 글들을 오래된 순서부터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글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여성잡지사에 취직했다가 몇 년 뒤 명품 선글라스 회사로 직장을 옮겨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고, 유럽과 일본, 발리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았고, 베네딕트라는 남자 배우의 광팬이었고, 손목시계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흰색 옷을 즐겨 입으며,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은 유미와 명숙이고, 제 작년에 스키장에서 미끄러져서 팔뼈에 금이 간 적이 있었고, 최근에 차를 바꿨다. 그녀는 아직 미혼이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는 꽤나 의외로 여겨졌다. 그녀가 쉽게 결혼에 안주할 성격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다소곳이 살고 있는 정민을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녀다웠다. 그녀가 올려놓은 사진들 중에는 남자들과 찍은 사진도 많았는데, 사진의 분위기와 쓰여 있는 댓글들의 어조로 봐서 자유롭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답답하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가 그는 어쩐지 좀 대견하기도 하고 또 내심 기쁘기도 했다. 이 거품같이 오글거리는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실제 하는 진짜인 것 같았다. 그녀가 진짜라면 자신도 진짜일 것이다.

마지막 사진은 바로 이틀 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크림색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아무런 과거도 없는 사람처럼 깔깔거리며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짧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꼭 한 번 먹어보자. 이것이 바로 루왁커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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