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세닐말미잘(Metridium senile)
나는 동해출신 다이버다.
다이버에게 출신 성분이 어디 있냐고 하겠냐만 다이버들과의 대화에서 ‘나 동해 출신이요’하면 경외의 눈빛을 받을 수 있다.
-아니 한국의 바다에서 첫 다이빙을 하는 애국자라니!
-East sea! 아시아의 동쪽 바다라는 그 광활한 곳에서 다이빙이라니!
-그저 가족과 해수욕만 하던 바다를 직접 들어가는 용기가 있다니!
이런 말들이 터져 나온다면 참 좋겠지만, 틀렸다.
진실은
그렇게 춥고 어두운 바다를 처음 들어갔는데도 다이빙을 계속하다니. 미친 건가?이다. 바다의 도른자에게 ’경외‘가 아니라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나의 첫 다이빙은 7월의 양양바다였다. 바다는 육지보다 한 계절이 늦게 오기 때문에 바다는 아직 봄이었다. 17도의 봄.
아마 꽤 추웠을 것이다. 첫 다이빙 후 이를 딱딱거리며 샤워실로 뛰어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기억이 있다. 그날은 추위보다 갑자기 벗겨진 오른쪽 핀과 급상승을 한 첫 바다 다이빙의 무서움이 커서 온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다 다시 가게 된 두 번째 세 번째 동해는 정말 추웠다. 5mm 슈트에 2.5mm 후드베스트까지 껴입어도 온몸이 얼음같이 굳었다. 입수하자마자 파리처럼 몸을 비비며 강사님께 엄지손가락을 乃 이렇게 치켜들었다. 좋아요! 가 아니라 물 위로 상승하자는 말이다. 이 짓을 돈 주고 왜 하나 싶었다. 그러다가도 설악산을 타고 내려온 끝내주는 바닷속 지형과 간혹 만나는 멸치 떼와 광어와 우럭과 멍게(왜 어째서 다 먹을 것인지)가 너무 반가워서 동해 다이빙이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이빙이 끝나고 장비를 씻던 어떤 다이버가 말했다.
‘동해에서는 그걸 봐야 진짜 동해 다이버라 할 수 있지 지금 바다는 너무 따뜻해서 못 봐. ‘
두꺼운 장갑을 껴도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느낌으로 다이빙을 하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추워야 나오는 아이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아오 안 봐도 됩니다. 지금보다 추운 바다를 어떻게 들어가요. 안 해 안 해. 그러다 심장마비 올걸요. ’
…
이듬해에 그 친구를 보고야 말았다.
수온 14도. 호흡기를 앙다문 입술이 얼어붙는 것 같았던 그날, 발아래에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꽃밭을 보았다.
’섬유세닐말미잘‘이 잔뜩 핀 말미잘동산을 만난 것이다. 깊고 어두운 바다에 하얀 꽃밭이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다. 기둥 위에 하얗게 보이는 촉수가 마치 솜사탕 같기도 하고 대형 콜리플라워 같이 보이기도 했다.
말미잘은 예민한 아이들이라 그 위를 지나다 물살이라도 맞으면 움츠러들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가가야 했다. 그렇게 추위도 잊고 한참을 바라보다 바다를 나왔다. 육지에서 이들의 사진을 다시 보니 불과 몇 분 전인데도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았다.
‘섬유세닐말미잘’
‘섬유’처럼 털 같은 촉수들이 뒤덮인 ‘세닐’(senile-영어 학명) 말미잘이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한국어와 외국어 학명을 섞다니 절묘하다. 근데 말미잘은 왜 말미잘이라고 하는 걸까
‘말미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국민학교. 쿨럭 아니 초등학교 때였다.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덕분이었다.
농구를 그만둔다는 이종원에게 신은경이 야이 바보 축구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놈아!(진짜 저 대사였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이런 비슷한 대사 끝에 말미잘이라고 한건 진짜다)라고 했고 이종원이 뭐 말미잘? 이러고 화를 내며 냅다 신은경에게 키스한다. 이게 무슨 말미잘 같은 전개인가. 어쨌든 어린 나는 말미잘이 얼마나 못생겼길래 이종원이 다른 욕은 다 듣고도 ‘말미잘’에 화를 냈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진을 보니 이종원이 화낼만하긴 하다. 촉수가 숨겨진 말미잘은 똥구멍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 말미잘은 똥구멍에서 유래한 말이다.
‘미잘’은 미주알의 줄임말이고 ‘말’은 신체 앞이나 무언가 큰 것에 붙이는 접두사로 쓴다.
그럼 미주알은 무엇이냐. 항문을 이루는 창자 끝을
가리킨다. (미주알고주알은 그래서 똥구멍 얘기까지 소소한걸 다 말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조상님들은 똥구멍같이 생긴 바다생물을 말미잘이라고 이름 붙이셨다.
다시 우리의 화려한 섬유세닐말미잘로 돌아와서
이 친구들은 추울 때만 촉수를 활짝 펼쳐서 먹이활동을 하기 때문에 수온이 올라가면 그 화려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보통 15도 이하의 바다에서 촉수를 내어놓는다. 따라서 동해에서 이 친구들을 본다는 건 매우 낮은 수온에서 다이빙을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해 다이빙을 할 땐 섬유세닐말미잘이 피었나 안 피었나로 추위를 가늠한다. 말미잘이 안 피었다고 하면 안도하며 아쉬워하고 피었다고 하면 두려워하며 기대한다. 변태와 성격이상자 사이가 이쯤 되겠다.
이제는 드라이슈트(몸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 따뜻한 다이빙 슈트)가 있기에 말미잘동산도 용감하게 다녀올 수 있어 변태성격이상자 다이버를 자처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때의 설렘과 떨림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에게 시리고도 아름다운 첫사랑인 동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섬유세닐말미잘을 내년 여름에는 다시 보러 가야겠다.
사진제공: 곰스쿠버
참고자료: 거의 모든 것의 바다(박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