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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May 30. 2021

흙 묻은 치커리를 씻으며

어머님의 텃밭

어머님의 오빠, 그러니까 내게 시외삼촌 되시는 분에게는 시골집과 텃밭(이라고 부르기엔 좀 넓지만)이 하나 있다. 시외삼촌께서는 도시에 사시면서 가끔씩 내려오시고 실제로 텃밭 농사를 짓는 건 우리 어머님이시니까 어머님네 텃밭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주로 '밭'이라고만 불리는 이 곳은 어머님뿐 아니라 형님댁, 우리 집, 가끔은 우리 엄마의 식탁까지도 책임지는 엄청난 장소다.


앞서 여름상추가 무럭무럭 자라나 무서운 속도로 상추를 먹어치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도 냉장고 안에는 이틀 전의 상추(씻어둔 것)와 일주일 전의 상추(안 씻은 것)가 공존하고 있다. 막 솎아내서 흙이 묻은 상추, 엄마가 비빔밥 해 먹으라고 주신 붉은 상추, 그 외 상추 두 봉지가 더 있었던 지난주에 비하면 많이 여유로워진 셈인데 어머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상추는 내일 밭에 가서 또 가져올게 더 가져가서 먹어라.'


물론 밭에는 상추만 있는 건 아니다. 계절에 따라 조금씩 라인업은 달라지지만 식탁 위 빠질 수 없는 재료인 파, 마늘, 양파, 쪽파, 고추부터 오이, 당근, 가지, 호박, 토마토, 방울토마토 같은 채소류, 상추, 치커리 등의 잎채소도 있고 들깨 참깨 고구마도 있으며 심지어 더덕까지 있다! 처음 밭에 간 날 그 종류와 규모에 놀라서 감동하고 말았다. 이 정도 되면 '내가 먹을 건 다 내가 길러 먹는다'라고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구나. 한편으론 이 많은 작물을 언제 다 심어놓으셨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어머님은 전업 농부나 다름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계셨다. 서울 계시는 큰형님이 텃밭농사 짓는 걸 극구 말리는 이유도 알 만했다. 아버님은 어머님이 무리하는 기색이 보이면 굴삭기로 밭을 엎어버리시겠다고 했다. 나는 동생이 굴삭기 면허를 곧 딸 터이니 필요하실 때 말씀하시라 했다.


해가 길어져서인지 어머님이 밭에서 퇴근하시는 시각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물론 옆에 있는 시골집에서 한낮 땡볕에는 쉬시고 TV도 본다고 하시지만, 전화할 때마다 지금 밭이라고 하시는데야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온 가족이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제철에 신선하게 먹으려면 이런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달 초쯤에 밭에 갔다가 흙 묻은 치커리와 상추를 얻어 왔다. 심은 지 얼마 안 되어 아주 어리고 보들보들한 녀석들이었다. 여느 때처럼 밭 구경을 시켜 주시다가 어머님이 치커리와 상추가 너무 잘 자라 빽빽하다고 하셔서, 나는 이파리 한 두장을 맛볼 요량으로 먹어봐도 되냐고 여쭤봤다. 그랬더니 어머님께선 즉석에서 솎아내기 작업을 시작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 그게 그 뜻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나는 손에 치커리와 상추와 약간의 흙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닐봉지가 열린 것은 그로부터 3주는 지나서였을 것이다. 솎아지지 않고 살아남은 상추들이 먹기  좋은 크기가 되어 결국 수확되었을 때가 되자 나는  이상 미룰  없다고 판단했다. 요리에 그다지 소질이 없는 나는 약간은 어설프게 치커리와 상추를 다듬었다. 물기까지 빼고 통에 넣고 나니 얼마나  시원하던지. 평소에  씻은 상추를 받아서 먹을 때에는 몰랐던 후련함이었다.


하나의 먹거리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과정들이 있고 나는 종종 그걸 외면하고는 했다. 하지만 평소 싱크대에서 보기 힘들던 흙덩이가 내게 어머님의 수고를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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