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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모솔새 Jun 02. 2021

앵두가 수박이 되는 마법

시골의 음식 인심

유럽의 전래 민화를 오브리 데이비스가 각색한 '단추 수프'라는 동화가 있다. 어느 겨울, 떠돌이 거지가 한 마을에서 단추로 수프를 끓여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는 이야기다. 사실 진짜 단추만으로 끓인 수프는 아니고, 단추로 수프를 끓이는 기적을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집에 있는 재료를 가져온 덕택에 끓인 수프다.


한편 우리나라 전래 동화 중에는 '좁쌀 한 톨'이라는 동화가 있다. 역시 여행 중인 총각 하나가 가진 좁쌀 한 알이 차례로 더 나은 것으로 바뀌다가 마침내 부잣집에 장가를 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시골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은 동화와 비슷한 듯하면서 조금 다르다.


먼저, '좁쌀 한 톨'의 총각처럼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은 잘 없다. 이웃으로부터 이번에 받은 게 있다면 다음번엔 내가 베풀 차례다. 이사 후나 경사에 돌리는 떡 정도야, 편한 마음으로 먹어도 되겠다.


주고받는 음식의 시장가치가 항상 비슷하지도 않다. 그야 당연히 각자 가진 것이 다르니 그럴 밖에. 늦봄에 건넨 앵두  줌이 여름이 되면 수박  통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점은 동화와 비슷하다. 동화에서는 좁쌀이 쥐가 되고, 고양이가 되었다가, 당나귀를 거쳐 황소가 된다.


반면 이방인 거지에 대한 텃세나 겨울의 혹독한 날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단추 수프'속 마을 사람들은 좀 쌀쌀맞게 느껴진다. 꼭 기적을 보여준다는 '쇼'가 아니더라도 여기 시골에서는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다. 양파 수확 시기에 상품이 되지 않는 양파는 밭에 그대로 굴러다니는데, 대개 맘대로 주워가게 한다. 다른 과일들도 마찬가지로 영 상품이 되지 않는 것들은 잘 부탁하면 얻을 수 있다.


우리 집에 대파는 있는데 부추는 없다면? 그러면 옆집에 얘기해서 부추를 뜯어오고 다음에 필요할 때 대파를 뽑아 쓰시라 하면 된다. 물론 대파를 안 기르는 집은 거의 없으니 그럴 일은 잘 없다.


그러니까 엄마가 계시는 면 소재지에서는 말만 잘하면 소고기 뭇국쯤 쉽게 끓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내가 지내는 읍내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생각해 보니 소고기를 얻는 건 좀 어려울지도 모른다. 대신 겨울철 떡국이라면 쉽게 가능할 테다. 어느 집에나 가래떡이 있을 계절이니까.




내가 어릴 적 현관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두고 가신 검정 비닐봉지가 종종 놓여 있었다. 엄마의 직업 특성상 가능한 일인데 일단은 감사의 뜻으로 음식을 받을 일이 많은 직업이라고만 밝혀 두겠다. 하여튼 간에 우리 집은 농사를 안 지으니까 이런저런 농산물이 검정 비닐에 배달되어 왔다. 때로는 상추나 대파 같은 기본적인 채소가 들어있었고 가끔은 두릅이나 머윗대, 고구마순, 마늘종 같이 철을 타는 식재료도 들어 있었다. 상품이 되지 않는 과일들도 계절이 되면 갖다 주시곤 했다.


꼭 식재료뿐만 아니라 요리를 받는 일도 많았다. 도토리를 줍는 계절이 되면 도토리묵도 한 번쯤 식탁 위에 올라왔다. 물론 동네 어느 집에서 갖다 주신 음식이었다. 가끔은 누구네 제삿밥이라고 생선에 나물밥을 먹게 되는 날도 있었다.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한 건 언젠가 한 번 얻어먹은 적 있는 멧돼지 곰탕이었다. 소고기로 끓인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맛만 조금 달랐다. 멧돼지만 빼고 나머지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에, 얻어 온 떡이 많아 우연히 마주친 아파트 경비원께 좀 드렸다. 마침 그분의 허기를 채워주는 역할을 했기를 바라며 생각한다. 내가 드린 떡이 꼭 내게 돌아오지 않더라도 좋다. 다음번엔 또 다른 모습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갔으면, 그래서 이 물물교환이 계속되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세상이 항상 동화 같을 순 없겠지만 이 정도 꿈은 꾸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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