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마음을 달래는 법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점심시간, 교내 방송에서 나온 노래가 내 귀에 들어온 그 순간이 어쩌면 ‘명함이 있던 시절’의 나를 있게 한 걸지도 모른다. '아워네이션 2'라는 밴드 노브레인과 위퍼의 노래가 절반씩 수록된 스플릿 앨범이었다. 시내 음반샵에 가서 한 달 3만 원인 용돈의 1/6을 투자해 '아워네이션 2' 카세트테이프를 샀다.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가요나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팝이 아닌 다른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음악을 듣기 위해 맨 뒷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기꺼이 선택하는 아이들이었다.
한정된 용돈으로는 살 수 있는 앨범도 한정적이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녹음하거나 친구들과 음반을 돌려 들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소풍 대신, 학교에 나와 출석만 하고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CD를 사고 클럽 공연을 봤다.
대학생이 돼 서울에 살게 된 후에도 용돈을 쪼개 CD를 샀고, 클럽 공연을 보러 다녔다. 또다시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밤새 MSN 메신저로 요즘 들은 음악 이야기를 하고, 몇 시간씩 걸려 뮤직비디오 파일을 주고받았다.
막연히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어떤 곳인지 잘 모르면서도 '기업'이라 불리는 회사에 다니는 건 싫었다. 나는 보통의 남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가 현실적인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아쉬워하며 살아갈 때 나는 꿈을 이룬 사람이 되고 싶었다.
클럽 공연을 보러 다니다 알게 된 언니와 오랜만에 만난 날, 집에 돌아와 아까 이야기한 음악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채용 공고가 있었다. 서류를 작성해 지원했고, 1시간 동안 면접(이랄지 처음 만나 사람과의 긴 대화랄지 모르겠는)을 보고 며칠이 지난 후 출근할 수 있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페스티벌을 만들고 공연을 만들고 음반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음악이 여전히 좋았다.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음악도 계속 찾아들었다. 1년에 한 번쯤 몇 백만 원을 쓰는 휴가를 갈 수 있게 됐을 땐 좋아하는 아티스트 공연을 중심으로 휴가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몇 달 후에 하는 해외 페스티벌을 보고 퇴근 후 집에 돌아가 “인생 뭐 있어?”하며 티켓을 구매하기도 했다.
몇 년 전부터 음악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다. 음원 차트에 있는 노래들이 어떤 건지, SNS 상에서 어떤 콘텐츠로 어떤 키워드로 프로모션을 하는지, 팔릴만한 음악인지 아닌지, 누가 차트 몇 위를 했고 누가 차트 인도 못했는지 같은 것들만 머릿속에 가득했고,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고, 타이틀 곡이 아니면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앨범은 순서대로 들어야지'라며 1번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부클릿을 뒤적거리며 듣는 걸 좋아하던 나였는데. 매년 새로운 아티스트를 찾아 해외로 공연 보러 가는 걸 좋아하던 나였는데. 그런 것들을 멈추는 데 드는 시간은 짧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지 아닌지가 왜 중요해? 사람들이 좋아할지 아닐지가 중요한 거 아니야?', '그런 거에 상처를 왜 받아? 일은 일일 뿐이잖아'라며 온갖 쿨한 척은 다 했는데, 어느 날 보니 내 마음이 너무 지쳐있었다. 상처 받는지도 모를 만큼.
좋아하는 걸 잃을 수 없다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친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건지 몰랐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일을 떠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