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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Aug 17. 2019

하는 일이 없는데 바쁘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있을 뿐

퇴사 후 종종 연락 오는 사람들에게 "언제든 좋지. 나는 이제 한가하니까!"라고 입버릇처럼 답장을 보내고 있지만, 막상 만나자고 하면 언제가 괜찮은지 머리를 굴려야 한다. 그러니까 회사를 다니지 않는데도 여전히 바쁘다. "평일은 저녁 8시 이후만 가능. 더 늦을 수도 있고. 주말은 그 주 돼봐야 알 수 있음. 아 그리고 절대 안 되는 날은 언제랑 언제랑 언제."라고 보내던 거에 비하면 훨씬 부드럽고 여유롭긴 하지만.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바쁘지?' 생각했다가 문득 깨달았다. '일=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틀린 건 아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일이란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이니까. 나는 요즘 적절한 대가는커녕 화폐 가치로 따지면 대가는 0이고, 무엇을 이루게 될지 못 이루게 될지 모르는 것들로 바쁘다.


뭐라도 좀 해보려고 노트북을 놓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보리차 끓여야 되는데' 생각이 든다. 보리차를 끓이고 돌아오면 '빨래 안 해도 되나' 싶어서 세탁물 바구니를 확인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와서 앉는다. 문득 바닥에 먼지가 눈에 띄어 다시 일어나 청소기를 돌리다 보니 책장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책들을 이리저리 옮기다 최근에 산 바이닐을 하나 꺼내 음악을 틀어놓고 요즘 읽는 다섯 권의 책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침대에 누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스마트폰 알림이 울린다. '세탁이 완료되었습니다.' 빨래를 널고 나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시간을 보니 점심 먹을 시간이다. '어쩐지 배가 고프다 했어.' 밥 먹고 설거지를 하고 보니 코바늘 뜨기 수업 갈 시간이잖아!


손재주라고는 없는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나 싶어 코바늘 뜨기를 시작했다. 유튜브 영상을 몇 번 봤지만 '저건 마술일 거야!' 싶을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라 근처 공방에 수업을 신청했다. 선생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걱정 말아요."라고 했지만, "집게손가락 펴세요!"라고 스무 번쯤 들었을 땐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집에 가고만 싶었다. '어 이제 감 좀 잡은 것 같아.' 생각하고 보면 모양이 이상해 실을 풀어헤치는 걸 한참 반복한 후에 네모난 티 매트 하나 완성했다. 연습한다는 핑계로 엉덩이를 붙인 김에 ‘빅 리틀 라이즈’ 시즌 1, 2도 끝냈다.


이번 달엔 글쓰기 수업도 신청했다. “5분 드릴 테니까 이러이러한 걸 쓰세요.”라고 하면 등에 땀부터 흐르지만, 수업 끝나고 온 날부터 다음날까지는 '과제해야 하는데'라며 무거운 마음으로 보내지만, 그리고 또 한 이틀은 '과제해볼까?' 하며 노트북을 펼치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걸 하루에 두세 번씩은 반복하지만, 수업은 재미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수강생들이 모두 그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글을 써서 놀랍다.


며칠 전엔 아침잠을 포기하고 가드닝 수업에 다녀왔다. 식물과 흙의 종류와 특성 등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가드너의 자기소개를 듣고 내 이야기도 한참 한 다음에서야 식물 중 한 가지를 골랐다. 식물 이름은 고른 다음에서야 알았다. 편견을 갖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걸 찾아보라는 뜻이었다. 분갈이를 한 후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으로 시간을 들여 고민하며 가지치기를 해 나만의 생각과 스타일이 담긴 식물로 만들었다. 눈 앞의 식물에 집중하다 보니 2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화분을 안고 돌아오며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식물을 위해 뭘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고민하다, 언젠가 내 스타일의 식물을 다른 사람에게 선보이는 날이 올지까지도 생각했다.


이런 나를 보며 친구는 물었다. “뭘 그렇게 자꾸 들어?” 친구 역시 오랜 회사 생활을 멈추고 긴 휴식 중이다. 운동을 하는 것 외에는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때그때 가고 싶은 데 가고, 먹고 싶은 걸 먹고, 보고 싶은 걸 보러 다닌다. 방법은 다르지만 우리 둘 다 월급을 받던 시절엔 잊고 살았거나 잊고 살아야만 했던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걸 거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가끔은 불안해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 부지런히 뭔가를 찾아다니는 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뭔지를 알기 위해서다. 거기에서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은. 지금은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고 있을 뿐이니까. 이번엔 또 뭘 배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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