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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Oct 18. 2019

말을 삼켜버린 날

이건 트리플 엑스 라지 토크거나 익스트림리 헤비 토크일 거야

에어컨과 서큘레이터가 24시간 근무를 하던 8월의 첫 화요일, 카톡으로 신청해 둔 코바늘 뜨기 수업 첫날이다.


“이 동네 살아요? 집 여기서 가까워요? 오는데 더웠겠다.”

“네, 근처 살아서 걸어왔어요.”

“몇 살이에요?”

“3N살이요.”

“어머, 나이보다 어려 보이네.”

“아 네 뭐.”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잠깐 암산이 필요했다. 대놓고 정확한 나이를 물어보는 건 명절 때마다 이제 몇 살이냐는 질문을 빼놓지 않는 작은 엄마 정도니까.


“결혼은 했어요?”

“아니요.”

“아직 결혼을 안 했어요?”

“네, 안 했어요.”

“요즘엔 다들 늦게 하니까. 애인은 있어요?”

“네.”

“그럼 됐지.”

“네?”


도대체 뭐가 됐다는 건지 궁금하지만, 내 물음표는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물어본다고 해도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물음표를 삼켰다. 가만히 있어도 목덜미가 땀으로 축축해지는 게 분명 여름 한복판인데 왜 벌써 추석 같지? 이번 추석은 작은 엄마의 질문에 답하는 게 싫어서 집에 안 간다고 엄마한테 미리 말했는데.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슬 뜨기와 짧은 뜨기 방법 말고도 선생님의 가족 구성원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다. 묻지 않은 질문의 대답처럼 이야기들이 내 귓구멍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걸 스몰 토크라고 하던가? 아니야, 이건 트리플 엑스 라지 토크거나 익스트림리 헤비 토크일 거야!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물어봐도 될까요?”라는 문장을 가르칠까? 내가 외국어를 배울 땐 그랬는데. 나이를 비롯해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 한국 땅에서 그것도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게 분명할 때는 이런 예의는 자주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호칭이 바뀔 리도 없는데 몇 살인지를 확인하고(열린 마음으로 생각하면 순수한 궁금증 또는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선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지운 채 결혼했냐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고, ‘그럼 됐지’라는 말로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애인이 있으니 다행이다. 애인과 결혼할 수도 있으니’라고 마음대로 단정해버린다(열린 마음으로 보면 결혼 유무에 따라 화제를 고르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계속해서 가족 이야기를 한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런 말들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을 겉으로 드러내면 순식간에 내가 이상하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른이 물으면 답을 하는 게 예의라는 게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도 단단히 뿌리 박혀 있으니까. 그러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잘 모르는 상대에게 나는 내 사생활을 말하고 싶지 않고, 또 그만큼 상대방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내 생각 같은 건 떠오르기 전에 꿀꺽 삼켜버리는 게 낫다.


결국 2시간 동안 이상하거나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대충 ‘아, 네, 뭐 그렇죠’ 대꾸하고, 마음대로 귓구멍을 통해 들어온 이야기는 공방 문을 열고 나오며 가능한 잊기로 했다. 여기는 한국이고 선생님보다 나이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니까.


나이에 따라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모습을 떠올리는 건 정말 쉽다. 학생이거나 직장인이거나 결혼을 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어떤 대화는 나이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나 보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삶의 모습을 가진 게 아니라서 이 가벼운 대화에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미 단단해진 생각을 애써 두드려 실금이라도 가게 만들고 싶은 의지도 용기도 내겐 없다. 다만,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말이 누군가의 무거운 마음이 되지 않도록 내가 말을 삼켜버린 그런 날을 자주 떠올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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