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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Oct 20. 2019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마음

이렇게 의욕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일하는 나를 만든 건 한 달 용돈 3만 원과 소리창고였다

아직 도시락 냄새가 남아있는 교실, 엉덩이가 무거운 나는 오늘도 허리만 틀고 뒤돌아 앉아 떠드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 방송은 말이 없다. 앨범 하나를 통째로 틀어준단다. ‘어 이게 뭐지?’ 쉬는 시간이면 늘 이어폰을 꽂고 있는 K에게 물었더니 '아워네이션 2' 앨범이란다. 토요일, 학교가 끝나고 집 대신 시내에 있는 소리창고를 찾았다. 평소 계산할 때 말고는 말 한마디 건네는 적 없던 아저씨가 “아워네이션 2 있어요?”라는 내 질문을 시작으로 입이 트인 사람처럼 이것저것 추천을 해준다. 그날을 시작으로 내 한 달 용돈 3만 원은 시디 3장 또는 테이프 6개로 교환됐다.

“라디오 들어야 해서 심화반은 못 해요!” 학년주임 선생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지만 사실이었다. 밤 10시부터 12시는 CBS에서 하는 ‘델리스파이스의 우리들’을 들어야 한다. 오늘도 공테이프를 준비해두고 노래를 녹음한다. 끝에 제발 광고가 안 나오길 바라며.

이번 주말에 K는 서울에 간다. 클럽에 공연을 보러 가는 거다. 테이프 6개 또는 시디 3개가 될 수 있는 3만 원을 하루에 쓸 용기가 없는 나는 오늘도 ‘부럽다’고 말해볼 뿐이다. 그렇다. 모든 일은 서울에서만 일어나니 내가 서울로 가는 수밖에. 목표가 생겼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다! 매주 공연 볼 거야! 시디도 향음악사랑 퍼플레코드 가서 살 거야!

집에서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자, “가기 싫으면 가지 마. 대신 네 결정에 대한 책임도 네가 지는 거야. 딴 소리 하기 없기다.”라고 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수학 55점 맞았을 땐 속상해했던 눈치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도 생겼으니 공부를 해야겠다.

1등을 하고 싶다거나 최고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다. 5년 후나 10년 후의 내 미래를 그릴 수 있었던 적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 될지 몰라도 또는 무엇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열심히 따라가는 건 할 수 있었다. 그저 뭐든 적당히, 욕먹지 않을 만큼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던 나를 움직이게 한 건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은 하고 싶은 마음이 됐고, 때로는 결과물도 안겨주었다. 내가 서울에 살면서 음악 회사에서 10년을 일한 것처럼. 그리고 당분간 ‘일하지 않는 사람’을 선택한 나는 ‘일하는 나’를 만들었던 시작을 가끔 떠올린다.

이렇게 의욕이 없어도 괜찮은 걸까

잘 지내냐는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의욕이 없는 것만 빼고는 잘 지낸다고 했다. 회사 다닐 땐 9월이 제일 바빴다. 추석 연휴가 길든 짧든 상관도 없었다. 연휴라 정시 출근이 아니라 늦잠을 조금 잘 수 있다는 정도에 기뻐하곤 했으니까. 그 반작용인지 몰라도 9월이 되자마자 의욕이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미루고 미루다 겨우 노트북을 열어도 글을 끝까지 쓸 수가 없었고, 잔뜩 사둔 책도 흘깃거리기만 하다가 겨우 한두 권을 끝냈다. ‘오늘은 좀 부지런히 보내볼까’ 마음먹고 할 일 목록을 마음속에 그렸지만, 첫 줄에 있던 화분 분갈이를 끝내자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하는 마음이 돼버렸다.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넷플릭스와 왓챠의 영상만 끊임없이 재생했다. 눈 운동만 하는 게 스스로에게 눈치가 보일 땐 코바늘 뜨기를 했다. 며칠 동안 텀블러 파우치, 노트북 파우치, 에어팟 케이스를 완성했다.

하루는 글을 쓰려다 또 완성을 못해서 멍하니 누워버렸다. ‘기분이 별로야?’라는 H의 말에 눈물도 터져버렸다. 진짜 뭐 하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아주 잠깐의 저울질 끝에 재활용도 아니고 일반 쓰레기통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취직하고 싶은 건 아닌데. 계획 없이 퇴사를 하면 이렇게 되나 보다 싶다가도 최소 6개월은 아무 생각 없이 놀기로 한 다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계획이었는데, 사실 퇴사 후 3개월 동안 마음껏 늦잠을 잔 날도 없다. 어쩌다 12시쯤 눈이 떠지면 ‘왜 이렇게 잤냐’하면서 자책했고, 이런저런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집안일도 하고, 여행도 다녀오고, SNS 관리도 하나 맡아서 바쁘다면 바빴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시간을 넘어 퇴근하고, 가끔은 휴일에도 일을 하던 때에 비하면 스스로 뭘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열린 시간이 흘러넘친다. 오랫동안 회사의 시간에 맞춰 살아온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당황스럽다.

친구는 ‘의욕은 원래 발등에 불 떨어져야 생기는 거 아니야? 꼭 해야 하는 게 없음 아무것도 안 해도 되지’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는 의욕이 없는 게 자연스럽다. 누군가에게 대가를 받고 있어서 내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일을 알기 위해, 뭘 좋아하는지 뭘 좋아하고 싶은지를 찾는 과정에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는 거다.

돌아보면 항상 다음에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대학에 가는 거라 공부를 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음악 회사에 취직을 했고, 회사에 들어갔으니 욕먹지 않고 일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고,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건 멋이 없으니까 좋아하는 걸 열심히 찾아다녔다. 다음에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아직 모르는 지금 나는 당황스럽다.

뭔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됐지만, 그건 곧 의욕이 됐고, 결과물을 맺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무엇이 될지 안 될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일’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한다. 일로 할 만큼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결과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보내는 시간을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빨리 좋아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으면 어쩌지? 자꾸만 피어나는 질문들이 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우선은 내 마음에게 시간을 줘야겠다. 회사의 시간이 아닌 내 의지로 결정하는 시간 사용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그리고 자꾸 말해줘야겠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좋아할 수 있게 해 주라고.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만 뒀던 일 목록도 만들어야겠다. 지금도 꼭 하고 싶은 일인지 물어보고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있으면 해보려고 한다. 더 이상의 질문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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