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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01. 2019

시간이 많다고 없는 열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새로운 걸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기억을 찾다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가 뻐근하다. 익숙한 통증. 아니나 다를까 씻으며 거울을 보니 골반이 틀어졌다. 이 정도면 그냥 낫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병원에 갔다.

“저한테 마지막으로 오신 게 2년 전이네요. 그 사이 아프진 않았어요?” 2년 동안이나 허리가 아픈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놀란다. “그때 다리까지 저려서 잠을 못 잘 정도라고 되어있어요.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죠?” 선생님 말에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파서 자다가 울면서 몇 번을 깼다. 아픈 것도 아픈 거였지만 사실 휴가를 못 갈까 봐 걱정이었다. 가까운데도 아니고 유럽인데, 가서 아프면 어쩌냐고 나를 걱정하는 H에게 괜히 짜증을 부렸다.  


처음으로 허리를 삐끗한 건 22살 때였다. 샤워하고 나오다 미끄러질 뻔해서 힘을 줬을 뿐인데, 기어서 겨우 욕조에서 나왔다. 어학연수 시절이었던 터라, 의사를 보러 갈 엄두도 못 내고 호스트 마더의 근이완제를 먹고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었다.


1년에 한두 번은 비슷한 일이 벌어졌기에, 동네에 있는 한의원은 돌아가며 다 가 봤다. 2년 전엔 한방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고통이 더 심해져서 정형외과로 옮겼는데, 원장님 말투가 단호한 게 내 스타일이었다. “허리를 보호해줄 근육이 없어서 그래요. 운동하세요? 안 하시죠? 그럼 스트레칭이라도 규칙적으로 꾸준히 해줘야 해요.”

그래도 디스크는 아니라니까 다행이라는 마음 반,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 반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하지만 휴가가 먼저니까. 유럽에서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거 보고 산책 많이 하고 돌아온 나는 허리도 운동도 잊었고, 운 좋게 다시 병원 가는 일도 없이 2년을 보냈다.

운동에 취미는 없습니다만

어렸을 땐 “시골 애 같지 않게 어쩌면 이렇게 얼굴이 하얗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면 엄마는 “밖에서 노는 거 안 좋아해요.”라고 대신 대답했다. 몸을 움직이며 노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좀 더 큰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체력장 때면 어떻게든 아픈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고, 최소한 오래 달리기 할 때만큼은 빈혈을 호소하며 양호실에 가서 누웠다. (턱걸이 같은 건 올라가자마자 떨어지면 그만인데, 오래 달리기는 걸어서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고 이러다 죽겠다’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고작 이거 움직였다고 이렇게 힘들다니. 평소엔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지만, 공연이나 페스티벌 때는 현장에서 움직여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거운 것도 들면서. 이대로 있다간 어디선가 쓰러져버리거나,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걷지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헬스장은 한 번 안 가봤지만, 호기롭게 PT 10회를 끊었다. 마지막 타임인 9시로 신청했지만, 그때까지 퇴근을 못하는 날이 많아 10회를 가는데 두 달이 넘게 걸렸고, 10회가 끝난 후엔 휴가를 갔다.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지는 베를린에서 나는 그 도시에 살고 있던 S와 함께 매일 밤 클럽에 갔다. 해가 떠있는 짧은 시간 동안 도시를 구경하고, 해가 질 때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 같이 나가서 맥주를 마시며 밤을 기다렸다. 12시쯤 클럽에 들어가 아침에 가까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서울로 돌아온 후 S는 자기는 일주일 동안 죽은 듯이 집에 누워있었다며, 도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체력이 좋아졌냐고 물었다.


PT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자신하며 살다가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이번엔 1:1 필라테스 레슨을 끊었다. 과격하게 움직이는 것도 없는데 땀이 나는 게 신기했다. 선생님이 보여주는 동작을 하는 건 세상 불가능한 일 같은데, 선생님 말을 들으며 따라 하다 보면 비슷하게 되는 게 신기했다. 문제는 카드 할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빨리 다시 카드를 긁을 상황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조만간 휴가를 앞두고 있던 나에게 그건 곤란했다.


이제 회사 안 다니니까, 시간 많으니까 운동하면 좋지 않을까? 대신 돈은 적게 쓰는 걸로. 아, 올해도 호텔 수영장에 몸만 담가봤잖아, 수영할 줄 알면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 것 같아. 구에서 하는 센터를 알아보니 신청부터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기존 수강생 등록이 끝난 후 남은 자리를 신규로 받는데, 신청은 7시부터, 번호표는 새벽 5시 30분부터 배부라고. 출근을 안 하니까 밤을 새도 괜찮고, 신청만 하고 와서 하루 종일 잘 수도 있지만, 시간이 많은 것과 상관없이 이건 나에겐 없는 열정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같이 수영하러 가는 날이 오면 좋겠다’며 수영모를 선물 받아버렸고, 운명처럼 온라인 신청도 가능해졌고, 허리 통증도 찾아왔다.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수영을 배울 거냐’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 나는 수영 기초반 등록에 성공했고, 낯선 장소 낯선 운동 낯선 사람들에 첫 출근을 앞둔 신입 사원처럼 긴장된 마음을 안고 수영장을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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