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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13. 2019

세상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나와 내 공간과 내 주위를 돌보는 나

이렇게 별 일 안 하면서 매일을 보내도 괜찮은지 가끔은 걱정된다. 어쩌다 하고 싶고 해야겠다 싶은 일을 몇 가지 떠올려도, 느슨한 줄 알았던 하루에 끼워 넣을 시간이 막상 없다.


하늘 색깔을 확인한다. 나무 하나쯤이 걸린 하늘을 사진으로 남길 때도 있고, 창 밖으로 흘깃 보고 말 때도 있다. 매일 밖에 나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날씨가 맑은지 구름이 가득한지 내다보고, 휴대전화로 기온과 바람과 강수 확률과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한다. 회사 다닐 땐 1층까지 내려갔다가 비 오는 걸 알고 우산 가지러 다시 올라온 날이 많았는데.


나무 스틱을 들고 거실과 베란다를 오가며 화분 스무 개의 흙 상태를 확인한다. 흙이 말라있는 애들은 욕실로 데려가 물을 주고, 하루 이틀 내 물 주면 될 것 같은 애들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읊어본다. 화분 밑으로 물 빠지는 게 멈춘 것 같아 욕실에 있던 애들을 자리에 돌려놓고, 습도가 낮은 날은 분무기를 들고 다시 한 바퀴를 돈다. 창으로 드는 빛을 바라보다 골고루 빛 받으라고 화분을 돌려준다. 조금 덜 신경 써도 괜찮다는 건 경험으로 알지만, 자꾸만 애들한테 눈길이 가서 엉덩이가 떨어지는 걸 어쩌나.


냉장고를 열어 소스를 하나하나 확인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건 미련 없이 버리자. 아직 비닐도 안 뜯은 새 것도 몇 개나 있지만. 버리고 나서 보니 죄다 H가 산 거다. 집에 돌아온 H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산 건 열심히 쓰고 안 쓸 거면 사지 말자는 다짐을 받아낸다. 1년 전, 이사 준비할 때도 그의 냉장고에서 엄청난 유물들을 발굴한 기억이 났다. 비어있다 싶었던 내 냉장고에서도 유통기한이 1년쯤 지난 게 두 개쯤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이사 갈 때나 하는 일인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쓸데없는 일들로 바쁘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사실 나는 어떤 쓸데없는 일로 하루를 보내도 상관없는 시간 부자다. 매일 8시간의 수면이 충족돼서 그런지, 알람 없이도 눈이 떠진다. 눈 뜨자마자 씻는 대신 ‘더 누워있고 싶은가?’ 스스로 물어본다. 그뿐인가, 오늘은 어딜 갈지 아니면 하루 종일 집에 있을지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있다. 회사 다닐 땐 꿈도 꾸지 못했던 일상이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행복해야 되는 것 같은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등장해 내 마음을 괴롭힌다.


언젠가 다시 일을 시작할 때, ‘쉬는 동안 그거 할 걸, 시간 많을 때 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어쩌지? 남들은 퇴사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하면서 알차게 보내는 거 같던데,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난 뭘 했다고 말할 만한 걸 안 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보다 나중에 일을 다시 하려면 지금 뭐라도 배우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만 하는 게 정말 쓸데없는 일인데. 일기예보를 보면 오늘 집 창문을 열어둘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고, 식물 흙 상태를 확인하면 적절한 시기에 물을 줄 수 있고, 소스 정리를 하면 미래의 내가 고마워할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이 좀 더 낫다.


자꾸만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지금 내 하루가 (돈이라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생산적인 일로 채워져 있고, 그래서 세상의 눈으로 보는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서도 그럴까? 여기에선 나 꼭 필요한 존재인 것 같은데. 내가 없으면 이틀에 한 번 보리차는 누가 끓일 것이며, 청소기는 누가 매일 돌리고, 세탁기 돌릴 시기는 누가 정하며, H가 깜빡하고 켜놓은 스위치는 누가 끄고, 흙 상태에 맞춰 식물 물은 누가 준단 말인가!


지난 10년 동안 세상이 원하는 대로 돈 버는 일에 나를 온전히 내어주며, 돈 버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나와 내 주위의 많은 걸 내팽개쳐놓고 살았다. 지금은 잠시 멈춰서 그동안 돈 버는 세상 속에서 여기저기 깎여나간 나를 돌보고, 내 공간과 내 주위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세상이 원하는 나’는 지금 일시 정지 상태라는 걸 인식하고, ‘나와 내 공간과 내 주위를 돌보는 나’만 재생하면 된다. 언젠가 ‘세상이 원하는 나’ 역시 다시 재생 버튼을 눌러야만 할 때가 올 테니까, 일시 정지 상태인 주제에 자꾸만 재생 준비 운동을 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여 숨이 턱에 찰 때쯤 겨우 도착한 산 정상에선, 내려갈 걱정을 하는 것보단 눈 앞의 풍경을 만끽하는 게 어울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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